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가 만든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보면, 20세기에 사는 두 남녀의 사랑을 두고 벌어지는 재판의 검사로 18세기 남자가 등장한다. 시비를 걸던 18세기 남자도 사랑의 절대성, 보편성 앞에선 결국 무너진다. 그렇지만 신세대 사랑 이야기일 게 분명한 <내사랑 싸가지>란 소설이 인터넷 어디에 있는지, 이햇님이란 사람이 대체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영화 <내사랑 싸가지>는 온통 선입견을 가지고 봐야 하는 대상이다. 굳이 말하자면 15년 전에 <내사랑 동키호테>에 나왔던 이응경이 극중 하지원을 바라보는 꼴이라고나 할까. 결과는? 영화와 관람자 사이의 이러한 간극은 이내 사라진다. 맹랑한 그들에게 책 속의 신데렐라 같은 건 더이상 의미가 없다. 왕자와 공주의 꿈이 깨지는 프롤로그부터 주인과 노비가 재탄생하는 에필로그까지 <내사랑 싸가지>는 씩씩하고 경쾌한 걸음을 걷는다. ‘싸가지’란 말은 ‘싹수’란 말의 방언이다. 하지원과 김재원의 발칙한 귀여움에 여러 번 크게 웃었으니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DVD 영상은 딱 평균적인 수준을 보여준다. 원경이 간혹 흐릿해 보이는 등 섬세한 맛은 없으나 전체적으론 만족스럽다. 사운드도 화끈해서 영화의 분위기를 십분 살린다. 감독과 촬영감독의 음성해설은 조금 심심한 편이다. 27분짜리 인터뷰와 53분짜리 제작영상 중에선 후자를 보는 게 낫다. 제작현장별로 잘 꾸며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