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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전설을 듣는다, <라운드 미드나잇>

Round Midnight 1986년

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출연 덱스터 고든

EBS 4월3일(토) 밤 11시10분

재즈 앨범 중에서 <발라드>라는 앨범이 있다. 표지엔 어느 흑인 연주자가 색소폰을 들고 검은 밤을 향해 흰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연주자 덱스터 고든의 대표작 중 하나다. 덱스터 고든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재즈 뮤지션들과는 색깔이나 연주방식이 조금 달랐다. 직접적으로 청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연주는 아니었다고 할까. 덱스터 고든의 색소폰 연주는 훨씬 담담하고 무심하며 또한 무신경하다. 둔한 느낌마저 배어 있다. 연주를 하는 모습도 어떤 종류의 몸짓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으며 거대한 나무가 묵묵하게 색소폰을 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에게선 수목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말년의 그는 마약중독의 상흔을, 국적 이탈자의 고독을 나무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떨구고 있었다”라며 어느 소설가는 에세이에 쓴 적 있다. 말년의 덱스터 고든의 자태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라운드 미드나잇>이다.

<라운드 미드나잇>은 ‘재즈의 몰락’에 대한 비탄을 담고 있다. 1959년 재즈의 인기가 시들해져가던 시기, 실험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색소폰 연주자 데일 터너(덱스터 고든)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 찌든 삶을 바꿔보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재즈 클럽 ‘블루 노트’에서 연주하는 데일은 제대로 된 연주를 위해 여주인과 클럽 주인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신세로 살아간다. 한편, 터너를 세계 최고의 연주자라고 생각하는 프란시스는 클럽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연주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터너에게 접근하고, 두 사람은 인생을 바꿀 우정을 싹틔우게 된다. 어떤 종류의 근사한 내러티브를 기대한다면 <라운드 미드나잇>은 실망스러운 영화가 될지 모른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배회하는 재즈 연주자, 그리고 그를 흠모하는 음악 애호가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이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친구가 되고 또한 가족처럼 지낸다. 그럼에도 끈끈한 우정을 간직하게 된 미국과 프랑스의 친구들은 서로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수는 없다. 뮤지션의 비극은 오랫동안 되풀이되고 심화된다. 만약 이야기에 관한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낮추고, 대신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라운드 미드나잇>은 황홀경의 연속이다. 덱스터 고든에서 허비 핸콕 등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들의 협연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즈 애호가라면 이 영화는, 놓치면 너무나 아쉬운 작품이 될 것이다.

베르트랑 타베르니에는 비평가 출신 감독이다.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계속 만들던 그는 1980년대 이후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영화들을 몇편 연출했다. 르누아르 영화에 바치는 헌사인 <시골에서의 어느 일요일>(1984), 그리고 재즈 찬미가라고 할 수 있는 <라운드 미드나잇> 등이다. 전형적인 프랑스영화의 형식실험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타베르니에 감독은 개인 취향에 의존해 영화를 만드는 심미안적 연출세계를 선보였던 것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