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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호로자식들의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 [2]

어머니에게 보내는, 뒤늦게 쓴 반성문

-작가 노희경이 말하는 <꽃보다 아름다워>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고독> 이후 많은 시청자들이 한때 자신들이 추앙해 마지않던 작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부터. 결국 2년 뒤 <꽃보다 아름다워>란 드라마와 함께 무덤에서 걸어나온 노희경에 대한 궁금증과 조급증은 최종회를 쓰기 위해 “점이 돼서 안 보일 만큼” 말라버린 그의 목에 빨대를 꽂는 만행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고독>을 끝내고 꽤 방황했던 것으로 안다.

=배운 게 많았다. 내가 어느새 장사를 하고 있구나, 같지도 않은 기교를 부리는구나, 섣부르게 이 정도쯤이면 드라마의 무게감을 줄 수 있겠지, 만만하게 생각했다. 그게 시청자들에게 들키니까 창피했다. 결국 내가 제일제일 싫어했던 작가가 돼버렸구나, 정말 바닥을 쳤다는 생각이 끔찍하게 들었다. 그때 스스로에게 느낀 치욕감 같은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드라마를 끝내고 나서는 소설도 읽고 다른 작품을 보는 데 시간을 썼는데, 이번엔 내 안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절에서 명상도 했다. 정말 쓸 거리가 남아 있는지, 지난 10년 동안 내가 뭘 했나, 세상을 보는 눈이 어땠나 하는 근본적인 생각. 사실 지금도 그런 고민의 연장이다.

-표민수 PD와의 작업을 포기한 것은 일종의 결단처럼 느껴진다. 윤여정씨가 “당신들 또 같이 드라마 찍으면 망해”라고 했다던데.

=윤여정 선생님뿐 아니라 박성미, 배종옥씨 등등 표 PD와 나, 둘을 너무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말렸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볼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들게 합의를 봤다. 이번만은 다른 사람들 충고를 들어보자고. 표 PD는 가족 같은 사람이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서로 참 많이 좋아하고, 너무 잘 알게 됐다. 처음 작업할 땐 정말 애인이 하루 걸러 싸우듯이 싸웠는데, 어느 순간 서로가 화면의, 글의 행간을 너무나 잘 읽게 되면서 오류에 빠진 거다. 딴죽을 걸고 서로 채찍을 때리는 사이가 돼야 했는데, 그러려니 넘어간 게 많았다.

-김철규, 기민수 PD와의 작업은 어떤가.

=절대 내 대본에 안 속더라. (웃음) 표 감독의 경우엔 둘 다 감정적이다 보니 대본에 연출까지 더해지면 감정이 아주 끝까지 간다. 그에 비해 김철규 PD는 드라이한 편이라서 시청자들을 덜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정반대의 조화가 나쁘지 않다. 평균적으로 나오니까. 표민수 감독은 호흡을 중심으로 연출하고, 그는 상황에 중심을 둔다. 사실 이 드라마는 여러 색깔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있는데, 전체적인 톤을 유지하고 고르는 데 김철규 PD나 기민수 PD가 가진 객관적인 눈이 상당히 도움이 된다.

<거짓말>

<바보같은 사랑>

-<꽃보다 아름다워>에는 노 작가 개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이 녹아 있는 것 같다. 뭐랄까, 뒤늦게 쓰는 반성문이랄까.

=난 참 게으른 사람이었는데, 엄마 돌아가실 때 이를 악물고 생각한 게 성실해지겠다는 거였다. 어미가 죽고나서야 정신을 차린 거지. (웃음) 암으로 저 세상 가시기까지 자식 여섯이 돌아가면서 당신 마음을 다치게 했다, 집 나가, 공부 안 해, 싸움 해, 담배 펴, 술먹고 뻗어, 파출소 들락거려. 순하디 순한 사람이라서 말 한마디 못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다고 본다. 심한 표현으로 하면 자식들이 사슴 목에 빨대 꽂아놓고 피 쪽쪽 빨아먹는 거다. 죽을 만하면 빨대 빼고, 또 살 만하면 다시 빨대 꽂고, 그것도 한명씩 돌아가면서 쪽쪽. 그런데 자식들은 이걸 합리화한다. 부모는 희생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그러다가 돌아가시면 후회하고, 반성하고, 노래방에서 <불효자는 웁니다> 이런 거 부르면서 운다. 그런데 결국 자기가 부모가 되면 똑같이 당한다. 인과라고 하잖나. 이 당연한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단 하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부모에게 한 짓을 처절하게 반성하는 거다. 효도할 마음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해야 한다. 자기 합리화에서 빠져나와 지금 당장.

-많은 이들이 영자씨가 자기 엄마 같다고들 하더라.

=처음 이 드라마의 제목은 <울엄마는 바보>였다. 모든 엄마는 바보다. 그런 바보에게 받을 땐 다 받다가 주어야 되는 입장이 되니까, 귀찮고 다 무시하고 싶은 게 자식이란 동물이다. 우리가 가장 잔인하게 구는 사람이 엄마가 아닌가. 삶의 가장 약자… 그런데 그 약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너무 많다. 사실 영자라는 캐릭터는 고두심이라는 배우와 함께 더욱 깊어진 역할이다. 대본을 쓰면서 어느 누구보다 참 많이 의지하고 있다. 고두심씨는 너무 도시적으로 예쁜 얼굴이고 똑똑한데, 가끔 보면 맹한 구석이 있다. (웃음) 제주도 촌여자의 순박함 같은 게 보인다. 그게 이 여자를 사랑스럽게 만든다. 배우들은 40, 50이 되었을 때는 진짜 무르익은 연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걸 보여줄 기회가 없다. 이들을 밥상만 들게 하는 것은 문화재를 박살내는 것과 같은 거다.

-재수 역의 김흥수는 이 드라마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우연히 한 쇼프로에서 이 친구를 처음 봤는데, 무슨 일인지 짜증을 내고 있었다. 헐렁헐렁해 보이는데 눈이 참 매서웠던 걸로 기억한다. 이후 시트콤을 보면서도 성깔있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자고 했다. 아니나 달라, 얼굴이 매웠다. 21살짜리가 산전수전 다 겪은 느낌이 있었다. 별 고민없이 결정했다. 고두심씨 아들이 김흥수랑 나이가 비슷하고 키가 멀대같이 크다. 진짜 엄마나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인 것 같다.

-아버지는 가장 악당인데도, 쉽게 욕할 수가 없다.

=선악의 구분을 지으려고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거다. 사람들이 엄마에게 많은 동정표를 보내면서 왜 아버지에게도 같은 희생을 강요하는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이 여자가 싫은데. 다른 여자가 좋은데. 게다가 좋아하는 여자가 아픈 데 가만히 죽일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뻔뻔하다는 걸 알지만 콩팥을 달라고 하는 거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비판을 할 수가 없다. 누가 누굴 욕하고 단죄할 수 있겠나.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잘못을 깨닫는 순간, 가장 고통받는 그 순간에 스스로 구원받는 거다.

<화려한 시절>

<고독>

<꽃보다 아름다워>

-결국 <꽃보다…>는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것에 대한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위로라, 결국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표현방식이 위로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안쓰러움, 엄마라서만이 아니라 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친구라서만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 그런 측은지심이 있으면 세상이 훨씬 더 편할 것 같다. 동물들은 서로 혀로 핥아주면 약을 안 발라도 상처가 낫는다. 배가 아플 때 손만 쓸어줘도 낫는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아프고 병들 때 서로가 서로를 핥아주는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거짓말> 이후 7년이 흘렀다. 그때의 열혈 시청자들도, 작가도 나이가 들었다. 혹시 사랑에 대해 회의적이나 냉소적인 시선이 생기진 않았나.

=사랑은 안 변한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지. <거짓말>은 지금 다시 써도 그렇게 쓸 것 같다. 다만 끝이 달라졌을 거다. 결국 준희가 성우에게 갔을 거다. 그때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남한테 상처주고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준희와 성우의 마음도 결국 변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을 가둬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마음이 열린 상태로 지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마지막 30회까지 남은 숙제는, 아버지에 대한, 형제나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에 대한,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용서는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적선 같은 느낌이다. 용서라는 말보다 어떻게 상대방을 ‘인정’하냐는 것이 될 거다. 미옥이는 결국 결혼식장에 가서도 아버지 손을 안 잡고 들어간다. 그러고나서야 이렇게 후회한다. 버릴 수 없다면 품어야 되는 게 옳지 않았을까, 하고. 우리 아버지가 바람을 참 많이 피웠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30년 넘게 미워했고. 그러다 지난해 여름에 처음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도리라고 생각해서였을 거다. 사실 자식인 나도 우리 아버지만큼 연애를 많이 했다. 단지 아버지는 결혼한 사람이고, 나는 결혼 안 한 사람이라는 거, 안 들키고, 들킨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렇게 인정하고나니 100% 진심이 아니었다 해도 마음이 편하더라. 미워하면 뭐 하겠나. 그렇다고 버려지지 않는데. 그리고 미워해도 기쁘지가 않은데. 가족이란 게 그런 거다. 사실 이렇게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 가족이라니, 공주 왕자가 안 나와도, 너는 아주 판타지드라마를 쓰는구나,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판타지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그나저나 오히려 용서나 인정은 쉽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기억이다. 기억이 더 무섭다. 그게 미수에게 남은 숙제다. 골이 찢어지는 것 같다.

-지금 가장 큰 고민은 뭔가.

=과연 이 이야기를 잘 끝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충분히 반성을 안 하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 서로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역부족이 아닌가 하는 걱정. 그래도 낼모래 죽을 건 아니니까, 계속 반성하고, 계속 생각하고, 나중엔 잘 써야지 하는 자기 위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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