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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호로자식들의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 [1]

노희경의 귀환, <꽃보다 아름다워>가 그리는 속상한 가족의 유쾌한 사랑법

“이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하는 영자씨”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다. 태어나 얼굴 한번 못 보았다 해도, 혹 더이상 볼 수 없다 할지라도. 세상에 난 모든 것들에겐, 엄마가 있다. 이 분명한 사실이 어쩌면 ‘마니아 드라마’나 ‘배고픈 명예’ 등으로 수식돼왔던 노희경 작가의 신작, <꽃보다 아름다워>를 시청률 20%에 가까운 대중적 지지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혹은 사랑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인 <꽃보다 아름다워>는 노희경 드라마의 종합판이자, 확장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뒤늦은 반성과 <거짓말>의 안타까운 선택, <슬픈 유혹>의 벅찬 포옹과 <바보같은 사랑>의 미련한 기다림을 경유해 비로소 도착한 안도의 화원(花園). <고독> 이후 가장 고독한 한철을 보낸 작가 노희경의 꽃 같은 귀환, <꽃보다 아름다워>는 왜 아름다운가.

세상 모든 호로자식들의 드라마

바보 같은 엄마가 있다. 사회를 위해 내놓은 것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참 비생산적인 시민이다. 이런 엄마는 이집 저집, 현관문을 열면 언제라도 한 다스씩은 튀어나온다. 김철규, 기민수 PD가 공동으로 연출하고 노희경 작가가 집필한 KBS2 수·목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는 그렇게 ‘바보 같은 우리집 엄마’에 대한 드라마다. 세상엔 똑똑하고 당당한 여자들로 넘쳐나지만 엄마는 늘 바보천치온달 같다. 아들 둘에 딸 둘, 밑이 빠져라 낳은 아이 넷은 이혼해서 친정에 눌러앉거나, 가슴에 대못을 박고 황천길로 떠났거나, 질척거리는 가족을 떠나 홀로 둥지를 틀고 살거나, 나이트 호객꾼으로 청춘을 낭비한다. 그래도 엄마(고두심)는 늦은 밤 복작거리며 싸우는 자식들을 향해 “아침먹고 다들 나가버려!”라고 소리 지른다. 당장 나가라는 것도 아니고, 다음날 아침에, 그것도 밥도 먹고 나가라고 소리지른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 밥풀 묻은 건 떼줄 수 있어도, 맘 아픈 건 어떻게 못해주는” 것을 미안해하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린다. 평생 남편을 갈아치우며 살아온 인철의 철 안 드는 엄마(김보연)도, 새 시집을 가기 위해 전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는 독한 엄마(배종옥)도 마찬가지다. 그 철면피 같은 여자도, 그 쌈닭 같은 여자도,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야 만다. 오로지 치매에 걸려 아이처럼 되어버린 엄마(김영옥)만이 귀여운 패악을 부릴 뿐이다.

그러나 <꽃보다…>의 엄마가 아름다운 것은 인내하고 희생하는 ‘한국의 어머니상’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드라마는 결코 엄마를 마리아 같은 숭배의 대상으로, 신사임당 같은 고고한 존재로 박제시키지 않는다. 대신 밥상을 차리고, 걸레로 방을 훔치는 그녀 역시 꽃 한송이에 설레고 오랜 사랑 앞에 흔들리는 ‘여자’란 걸, “내 뱃속 가르고, 그것들이 얼마나 잘사는지 두눈 시퍼렇게 뜨고 볼 거야!”며 꼬인 속내를 끝내 드러내고 마는 ‘사람’이란 걸, 이혼까지 한 딸이 교수사위를 물고왔음에 기뻐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란 걸, 버스창에 “나는 나쁜 년”이라고 써가며 ‘남이 주는 상처도 모자라 제 가슴에 또다시 상처’를 내고야 마는 소심한 ‘인간’이란 걸 보여준다.

그렇게 세상을 구하지도,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엄마들의 화장기 없는 속살을 보고 있다보면 문득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되뇌게 된다. 그래, 한때 나 역시 그렇게 말했었지. 내 인생이라고. 신경쓰지 말라고. 언제 도와준 적 있었냐고. “엄마는 착한 게 아니라 방관자”였노라고, 심장을 핡퀴고, 기어이 피멍자국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지. 우리 모두 그런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그런 ‘호로’자식이었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피고인이 될 수밖에 없다.

“살아서는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녀없이 세상이 살아지니 참 묘하다.” -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작가의 말 중

피는 물보다 편하더라‘언제나 웃음이 넘치는 화목한 우리집’은 공익광고에나 등장할 판타지다. <꽃보다…>의 카메라는 “밖에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거 같아도, 들여다보면 다 똑같은” 우리집의 대문을 열고 거침없이 돌진해 들어온다. 파출소 들락날락거리는 남동생? 반가울 리 없다. 딴살림 차리고 배다른 동생까지 낳아온 뻔뻔한 아버지? 제발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똥오줌 못 가리는 치매 걸린 할머니? 온 가족의 짐짝이다. 이혼한 것도 모자라 성질도 ‘지랄맞은’ 언니? 인생의 걸림돌이다. 그러는 너는 유부남이랑 연애질이냐? 할말없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은, 결국 “화병이 나서 쓰러지게 만드는” 징글맞은 존재. 사실 가족이란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내가 아쉬울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용돈 주는 누나가 싫지 않고, 우렁각시처럼 청소해주는 엄마가 고맙다. “남자들이 여자 보는 기준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섹시”라고 조언해주는 막내동생이 사랑스럽고, 힘든 사랑에 허덕일 때 “넌 언제나 내 자랑이었어”라고 말하는 언니가 따뜻하고, “호주제 폐지되면 제일 먼저 이름을 빼버릴” 아버지에게 없는 돈에 감기약까지 사서 안기는 아들이 든든하다. 자식과 부모의 헤게모니는 시시때때로 전복되고, 자매와 형제는 선망과 질투가 뒤섞인 가운데 유사모녀, 부자관계를 맺는다.

<꽃보다…>는 일면 가족의 징글징글한 속성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 피의 끈적임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버릴 수 없다면 품으라고 말한다. “개새끼만도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대성통곡하는 아버지도, 구박덩이 배다른 동생도 품지 않으면 어쩌냐고 말한다. 길거리 소녀 제인(조은지)과 지니(추소영)도, “식구들끼리 식탁에 앉아 된장찌개에 밥 비벼먹는” 소박한 가족의 재건을 꿈꾸었던 인철(김명민)까지도 이 보잘것없는 가족의 울타리 속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지지고 볶고, 욕하고 때리고, 증오하고, 원망하더라도,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대가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는 바로 가족임을 상기시킨다.

“훗날 미수가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입맞추고, 포옹하고, 데이트하는 즐거움도 컸지만, 엄마와 형제들과 신나게 장난치며 웃고 떠들던 그 즐거움도 참으로 큰 것이었다고. 재수도 나도 그렇다고 했다.” - <꽃보다 아름다워> 중 미옥의 내레이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유죄

<꽃보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미친 인간들이다. 아버지는 지금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자고 아내의 콩팥까지 떼어간다. 남편에게 맞고 이혼한 딸은 또다시 결혼이란 걸 하겠다고 발악한다. 잘난 대로 잘난 처녀가 ‘하자있는’ 유부남 때문에 잠 못 이룬다. 멀쩡한 총각 교수(박상면)가 생선파는 이혼녀와 결혼하겠다고 가족과 대립한다. 한 여인을 몇십년 동안 기다렸던 중년의 사내(장용)는 “나이 먹어 이렇게 어쩌다 한번씩 본다고 무슨 죽을 죄가 되겠냐?”며 사랑 앞에 무죄임을 스스로 선언한다. 이렇게 드라마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모두 유죄’라고 말한다.

오히려 주변의 비난에 힘들어하는 여자에게 사랑은 어려워서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사랑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에게 “그렇다고 사랑을 안 하는 것도 바보 같지 않니?”라고 되묻는다. 물론 가끔은 젊어서 사랑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어서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속에 없는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어디 그런가 “사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노희경은 7년 전부터 말하지 않았던가.

<고독>을 척박하게 만들었던 유머의 상실은, <꽃보다…>에서는 새롭게 소생한다. “나 봐주는 의사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라고 묻는 엄마에게 “그럼 너 봐주는 의사선생님한테 물어보지, 옆집 아줌마 봐주는 의사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봤겠냐, 쓸데없이…”라고 대답하는 아버지의 대사처럼, 문장으로 떼놓고 봤을 때 전혀 웃기지 않을 말들은 상황 속에서 빛을 발한다. 또한 지니와 제인, 재수가 내뱉는 젊은이들의 대화는 무심하게 툭툭 오가는 속에 불쑥 삶의 진실을 내뱉고야 만다. “손님 물었냐?” “자식아, 내가 똥개냐, 손님을 물게.” “그럼 엮었냐?” “손님이 꽈배기냐, 엮게.” “아, 기집애 거 대충 넘어가라.” “사는 게 담 타는 거냐, 자식아, 대충 넘어가게.”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이유

알고보면 나쁜 사람 없다. 이 드라마의 논리는, 말하자면 이렇다. 해준 것 하나없이 달라고만 하는 아버지도, 형제를 죽인 원수도 결코 악역으로 만들지 않는다. 집요하고 끈질긴 생태인류학자인 동시에 이상주의적인 로맨티스트 노희경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위로한다. “너두 나한테 잘하고 싶었을 텐데, 내 맘에 드는 신랑감 가져오고 싶었을 텐데… 그게 사람 맘대로 안되는 걸… 울지마, 애기야, 기운 빠진다”며 어미가 자식의 어깨를 다독일 때, “무서워하지 말아요. 내가 무섭게 안 하고, 웃기게 해줄게”라며 남자가 여자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 “엄마가 엄마 거야? 엄마가 엄마 것도 아닌데, 왜 엄마 맘대로 해!”라며 책망섞인 말로 사랑을 표현할 때, “염치없는 말이지만은 니가, 애들이 나를 용서해줬으면 하고 기도하며 접었다”며 몇 캐럿 다이아몬드 같은 종이학을 내밀 때, 그래도 이런 위로가 있으니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게 서로 죽지 않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냐고 설득한다.

엄마는 어느 날 복잡한 세상을 잊고, 아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과자를 달라고 사탕을 내놓으라고 칭얼댈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하는 영자씨,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인들 못하리까. 그렇게 <꽃보다…>는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기분 좋게 갚아나가라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묻지 말고 유효기간 안에 열심히 사랑하라고,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기 전에, 용기를 내어 전화기 버튼을 누르라고 등을 떠민다. 다그치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조용히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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