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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문학의 밤

그 얘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다. <문학의 밤>을 떠올리는 일은- 이를테면 남자들끼리 몰려간 커피숍에서 <우유>를 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것은 연미복을 입고 출근을 한다든지, 동원예비군훈련에 바비 인형을 가지고 가는 일과도 흡사하다. 저기… 이게 뭡니까? 이건… <문학의 밤>입니다. 뭐랄까, 그런 기분이다.

좀 오래된 얘기 같지만, 그러나 확실히, 옛날엔 <문학의 밤>이란 것이 있었다. 무릇 세상엔 여러 가지 밤이 있겠지만, 이보다 복잡한 기분의 밤은 없을 거란 생각이다. 묵묵히 한잔의 우유를 마시며, 나는 <문학의 밤>을 떠올린다. 마치 바나나와 딸기와, 또 초코 맛의 우유가 나오기도 전의- 오래된 옛날 같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바다 속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의 행사였는지도 모른다. 검은콩 우유를 마시는 당신이라면, 영원히 그 물속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래서다.

나는 그래서 시를 썼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 무렵엔 시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여학생들이 돈보다는 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배겨낼 재간이 나로선 없었다. 마침 허영만 화백의 <카멜레온의 시>가 모두를 사로잡아, 나는 로트레아몽의 시집을 하여간에 외워야 했다. 학급의 실장이었던 J는 겨울부터 내내 <알함브라의 궁전>을 연습해왔고, 폭력서클의 보스 N은 인근 여상의 백합- L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시낭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극부의 Y는 벌써부터 러브레터를 받기 시작했고, 축구부의 K는 도대체 뭘 하려는지, 팔굽혀펴기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축제의 전날 밤엔, 축제 전날에만 뜰 수 있는 붙박이 달이- 내내 한자리에서 불면의 밤을 비춰주곤 했다. 그 순백의, 우유 빛의, 달빛이란.

고백하건대 나는, 얼굴을 마주한 모든 여학생들에게 “로트레아몽을 아시나요?”라고 정말이지 물었고, J는 뭐랄까 <알함브라의 판잣집> 같은 걸 연주했으며, N은, 맙소사 N은 <목마와 숙녀>를 낭송하다 정말로 눈물을 흘렸고, Y의 공연은 질투심 때문에 가보지도 않았으며, K는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이려다 그만 분위기에 휩싸여 말춤을 열심히 추었다. 하여간에, 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행사를- 하지만 세상의 여학생들은 용서해주었다. 아니 솔깃, 해주었고, 환호해주었다. 놀랍게도 얼굴을 마주한 여학생 모두가 로트레아몽을 알거나, 아는 척했고, 알함브라의 판잣집 따위에도 앙코르를 외쳐주었으며, 의외로 심약했던 문제아의 시낭송에 함께 눈물을 흘려주거나, 허벅지가 굵어 슥삭슥삭 소리가 나는 말춤에도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세상에나, 문학의 밤이여.

그 <문학의 밤>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마치 거짓말 같다. 취업의 밤, 재테크의 밤, 부동산의 밤, 주식의 밤, 혹은 원조교제의 밤을 보내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의 어딘 가에서 아틀란티스 대륙 같은 것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아니, 이곳은 물속이다. 고백하건대 문학의 밤을 보내고도, 우리는 <별 수 없이> 세상의 노예가 되었다. 세상에나, 이제 문학의 밤조차 보낼 수 없다면, 또 보낸 적이 없다면, 그럼 우리에겐 어떤 <별 수>가 있는 걸까?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래서, 이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이 예비군훈련장에 나는 왜 바비 인형을 가지고 들어온 걸까? 저기… 이게 뭡니까? 이건… <문학의 밤>입니다. 뭐랄까, 그런 기분이다. 그래도 문학의 밤을 생각하니, 바다 밑바닥의 아틀란티스 유적 위에서 한잔의 우유를 마시는 기분이다. 박민규/무규칙이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