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아주 가난한 판자촌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단칸방에 연탄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전부인 판잣집인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부엌 벽 한켠에 난 자그마한 창이었다. 16절지 종이 한장보다 조금 작은 그 창은 똑같은 구조의 옆집의 부엌으로 나 있었는데, 그 창의 용도는, 세상에, 그릇을 나눠쓰기 위해서 뚫어놓은 것이었다. 부엌살림조차 넉넉하지 못해서 이웃간에 서로 시간차를 두고 식사를 하면서 그릇을 빌리고 빌려주며 궁핍한 생활을 땜질하곤 했던 것이었다. 그 작은 창으로 오고갔던 것은 스테인리스 밥그릇과 찌그러진 양은냄비만이 아니었으리라. 그 따위 구질구질한 가난의 풍경에 대해서 낭만적으로, 감상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 밥그릇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오고갔음을 어린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러기에 이웃은 사촌이라 하지요. 멀리 있는 친척도 사촌만은 못해요. 그 누가 뭐래도 이 마음은 언제나 내 이웃의 슬픔은 내가 대신 하지요’(<이웃사촌>, 엄진 작사·작곡, 옥희 노래)라고 노래하는 가요가 그 당시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라는 반전도 퍽이나 상투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인구 밀도는 그때보다 더욱 높아져 우리는 더 많은 이웃을 더 많이 상하좌우로 두고 살지만, 이웃간의 교감의 밀도는 현저하게 희박해져버렸다. 옛날이야 이웃집 사는 김씨네 논물이 흘러 내 논을 지나 옆집 박씨네 논으로 흘러가듯, 한 마을에 산다는 일이 끈끈한 관계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옆집 사는 박씨인지 김씨인지 잘 모르겠는 이웃을 주차시비만 아니라면 일년 내내 인사할 일도 없는 게 현실이다. 나는 최근에 새로 이사온 동네에 이웃집들에게 인사를 다녔는데, 이웃들은 대부분 현관문을 딱 자기 얼굴 반만큼만 열고 인사를 받았다. 그 정도면, 그래도 충분하다. 그 가난했던 판잣집 부엌에서의 그 작은 창으로도 정이 오고가며 웃음꽃을 나눴으니, 현관문은 얼굴 반쪽만큼 열어도 밥상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래 그 정도면 된다, 라곤 하지만, 사실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전화와 인터넷 케이블이 아니라면 우리집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이웃집과는 어떤 통로가 가능할까.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예술가 www.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