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절대반지
강유원(철학박사) 2004-03-11

절대반지는 뜨거운-이 표현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다. 어디 그것을 '뜨거운'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온도로 펄펄 끓어오르는 상황이란걸 과연 말로 할 수 있을까- 곳에 집어 넣어야 사라진다. 절대반지야 워낙 사악한 것이니 그렇게해서라도 없애야 할 것이겠지만, 돌이나 금속에 새긴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데이터를 담는 그릇, 즉 넓은 의미의 매체와 데이터 보존/소실을 생각하게 된다. 데이터를 기록하는 기호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그것을 담는 매체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몇십년 전부터 뜨겁네 차갑네 하는 이야기가 시작된 바 있기도 하다. 그릇은 데이터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정보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지도 모른다.

 동굴 벽에 뭔가를 새겨서 알리는 시대에는 데이터를 가지고 다닐 수 없었다. 한번 새기면 그건 그 자리에 딱 붙어 있었다. 그걸 보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야했고, 그곳에 모여야 했다. 매체의 고정성. 사람들이 그 앞에서 모여 의례같은걸 행했다면 개인 행동은 어려웠을게다. 고정된 매체 앞에서 행위의 통일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돌에 새겨진 것들은 오늘날에도 동굴 벽에 새겨진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의 흔적을 쫓아 무슨 날이 되면 기념비 앞에 모여서 단체행동을 한다. 매체가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우리가 아직도 두루마리로 된 책을 보고 있다면 책들춰보기는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필요한 부분을 쓰윽 펼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안보고 말면 그만이지만 어디 그런가.

 고정된 매체의 시대가 지나 휴대 장치에 담는 시대가 도래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휴대장치의 시대다. 점토판과 USB 메모리 장치는 휴대장치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진흙에 새겨서 굽기, 돌에 새기기, 금속에 새기기. 그에 이어지는건 파피루스에 쓰기, 죽간에 쓰기, 종이에 쓰기라고 하는 쓰기의 시대다. 새기기건 쓰기건 이것들이 진정한 휴대성을 가질 수 있고, 여기저기 나누어지려면 복사가 수월해야 하고 간편한 휴대장치에 복사되어야 한다.

 근대의 활판 인쇄술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손쉽고 정확한 복사와 휴대 간편한 책의 등장은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사람들은 여전이 돌도장을 새기기도 하고 반지에 이름을 새기기도 한다. 새기는 일이 사라지지 않았음은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각 데이타 처리의 주류 방식은 역시 종이에 찍어내는 활판 인쇄술이다. 매체는 정해졌다. 종이인 것이다. 방식도 정해졌다. 찍어내기인 것이다. 이제 새기기는 귀족적인 행위로 고양되거나 천박한 일로 전락하거나이다.

 매체와 방식이 정해졌다는 사실이 유연함을 자극한다. 구텐베르크가 찍어낸 성경의 서체와 편집 디자인은 중세적인 흔적을 보여준다. 그 고통의 양이 새기기와 다르지 않았던 양피지에 쓰기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곧 유연하고도 다양한 편집으로 이어진다. 휴대장치의 시대에 어울리는, 개인에게 소장되는 책에 걸맞는 많은 방식들이 개발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근대의 개인은 내밀한 공간에서 내밀한 자기 종교를 만들어 의례를 행해왔다. 여럿이 모여, 소리내어 읽기가 아닌 조용히 눈으로 읽기를 즐겼다. 매체와 방식은 개인의 관음증에게 봉사한다.

 매체가 단단하면 데이터는 오래 살아 남는다. 매체가 부드러우면 데이타는 금방 찢긴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내가 잘 간수하면 내 품안에 있을 수 있다. 현대는 바야흐로 디지털 매체의 시대. 접속만 된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웹에 있는 데이터는 가질 수가 없다. 늘 저기 FTP서버에 올라가 있을 뿐이다. 내 품에 품을 수가 없다. 멀어짐. 내게서 멀어짐. 딜리트 키 누르기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지는 데이터들. 휘발성 매체의 시대에 반지에 새기기를 생각해본다.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