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후 일본 만화에서는 이전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부모 캐릭터가 대규모로 등장한다. 아다치 미쓰루의 <터치>가 대표적인 예로, 주인공의 부모는 자식들의 생활엔 관심이 없고 마치 연애하듯 자신들의 행복에 집중한다. 전 시대의 강압적이거나 헌신적인 부모(대표적으로 <거인의 별>의 아버지)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자유방임형의 부모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식들에게 모든 의무를 떠넘기는 극단적인 무책임의 양상까지 선보인다. 가와하라 유미코의 <클라임 더 마운틴>, 이마 이치코의 <어른의 문제>, 모리나가 아이의 <타로 이야기> 등 ‘무책임 부모’를 키워드로 하는 코미디는 이미 여성 만화에서 서브 장르화되어 있는 느낌까지 든다.
<바사라>의 만화가인 다무라 유미는 <타무라 유미의 만능캡슐>(서울문화사 펴냄)을 통해 공주병 엄마에게 착취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반달 모양의 처량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류자부로는 전직 여배우인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엄마는 왕년의 영화로운 생활을 잊지 못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로, 집안 살림은 모두 류자부로에게 맡기고 화려한 바깥 나들이에 전념하고 있다. 덕분에 아들은 알뜰한 장보기에 식사 준비와 청소까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모자는 옛 귀족이 살았던 성에 살고 있지만 방탕한 엄마의 생활 때문에 재산은 바닥났고, 소년의 궁핍 생활이 아니라면 파탄은 머지않아 보인다.
‘내가 도둑이 된 이유’, ‘내가 유령이 된 이유’, ‘내가 천사를 낳은 이유’ 등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운율의 소제목들은 류자부로가 겪게 되는 사건의 스케일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앞뒤 분별없이 사고만 저지르고 보는 엄마, 뒤늦게 재결합했지만 그 멍청함 때문에 도움이 안 되는 형사 아빠 덕분에 류자부로는 언제나 보통 사람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활약을 해야 한다. 못 말리는 가족의 활동 반경은 북유럽의 리트비아 공국, 남미의 갈라파고스 제도에까지 넓혀진다. 터무니없는 모험물이기는 하지만, 생활력 강한 소년 류자부로의 생생한 감성은 독특한 웃음을 만들어낸다.“나는 어째서 엄마 때문에 감옥에 있는 거지? 내 인생은, 내 취직은, 내 결혼은….” <타무라 유미의 만능캡슐>의 세계는 마야 미네오의 <파타리로>와도 통한다. 하지만 1년 열두달이 봄인 부자 나라의 왕자 파타리로의 철학이 ‘인생 만고땡’이라면, 가난한 생활 소년 류자부로의 머릿속은 온통 걱정 신경계가 점령하고 있다. 굳세어라 소년아, 행복해질 거야. 너 덕분에 적어도 엄마와 아빠만은 행복해질 거야.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manaman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