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즐길 시간은 없었지만, 듣자 하니 베를린영화제 시상식에서 조그만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부의 지원감축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나체로 식장에 뛰어들었다가 경찰에 연행되고, 한 사내는 용케 초청장 없이는 못 들어가는 식장에까지 난입하여 핸드 마이크로 뭐라고 열심히 떠들어댔단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자의 반응이다. “당신의 주장이 뭔지 들어보겠다”며 식장에서 그 사내에게 몇분 동안 발언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발언권을 얻기는 이보다 좀 힘들다. 골리앗 크레인 위에 올라가 150일을 농성해도 발언권이 안 생긴다. 차라리 그가 거기에 아무 주장없이 그냥 올라갔다면 어땠을까? 아마 신문은 벌써 이 기인의 기사를 실었을 것이다. 미용실 잡지는 이 기인의 부인을 인터뷰하고, TV 카메라는 속세를 떠난 고공의 철학을 비추었을 것이다. 기네스북에 오를 대기록을 가지고도 그가 매스컴의 버림을 받은 이유가 뭘까? 그가 거기에 ‘노동자’로서 주장을 갖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150일간의 농성도 ‘사건’이 될 수 없다. 발언권을 얻으려면 그보다 ‘필사적’이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반드시 죽어야’ 한다. 150일간의 농성 끝에 그가 목을 매자, 비로소 그것은 신문 몇줄짜리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또 한명의 노동자가 몸에 불을 질러 이 사회에 발언권을 신청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연쇄적으로 터져도 이 사회에서는 그게 도대체 ‘사건’이 되지 않는다. 논의되고, 토의되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동자가 줄줄이 분신을 한다면, 사회의 소통에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농민들이 줄줄이 음독을 한다면, 사회의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런 것은 ‘정치적’ 문제로 인정받지 못한다. 언젠가 영등포 경찰서장 하던 분.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신을 “욱하는” 성격 탓으로 돌렸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는 졸지에 의학적으로 치료해야 할 ‘심리적’ 문제가 된다. 앞으로 경찰서장도 확 용역 줘서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할까보다.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이런 게 정치적 문제다. 정치는 이런 거 해결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근데 정치는 뭐 하고 있는가? 농민을 슬퍼해야 할 시간에 뇌물 먹고 자살한 어느 공직자나 애도하고 자빠졌다. 노동자를 구제해야 할 시간에, 옥에 갇힌 서청원이나 구원하고 자빠졌다. 여당은 다른가? 교육 다 망가뜨린 주제에 자기 자식 학비 수천만원짜리 유학 보내놓고, 국민세금으로 공군 전투기 타고 에어쇼를 하고 자빠졌다.
하긴, 언젠가 정신적 여당의 노동위원장이 육체적 단식을 하긴 했다. 이유가 뭔지 아는가? 특검 요구하는 최병렬의 단식을 풀라는 덩달이 단식이었다. 이게 1천만 노동자의 대표다. 그럼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표하여 그 당에 들어간 분은? 동지들이 몸에 불사르고 죽어가는데 저 홀로 공천을 꿈꾼다. 대통령이 툭하면 내뱉는 그 싸가지 없는 표현, 즉 “노동귀족”이라는 표현은 원래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배반한 대가로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이런 분들을 일컫는 말이다.
아, 그가 “노동귀족” 운운해도 내가 할말없는 경우가 있긴 하다. 이번 분신사태가 벌어진 현장, 현대중공업의 노조에서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분신대책위’ 참가를 거부했다고 한다. 같은 노동자이면서 다른 노동자의 절규에 귀기울이기를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죽은 노동자가 남긴 유서에 따르면 정규직 노동자들이 심지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멸시하기도 했단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철저하게 지배자의 논리를 체화한 “노동귀족”의 행태다.
대통령이여. 이제 저들을 “노동귀족”이라 질타하세요. 그리고 당장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해서 싸우라고 촉구하세요. 고롷게는 못하시겠죠? 그러니까 운동권 어휘 배워서 그 따위로 써먹지 마세요.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들이여, 연대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은, 툭하면 “노동귀족” 운운하는 저 노란 대통령이 약속하는 정규직 노동자의 찬란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