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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그 악마의 시대

영화 <실미도>가 관객 1천만명을 돌파했다. <실미도>를 안 봤으면 간첩이란 말도 나오는데 게으름을 피우며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꼼짝없이 간첩의 반열에 오르게 생겼다. 빨리 자수하여 광명을 찾아야지 생각하다가도 “아니지, 대한민국 국민 중에 <실미도> 안 본 사람이 3천만명도 넘잖아” 하며 느긋한 마음을 품어본다. 사람들의 반응도 갖가지이다. 국가주의를 비판했다는 감독의 의도에 충실하게 국가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때 김일성 목을 따왔어야 하는 건데…” 하며 엉뚱하게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꽤 되나보다. 뒤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해임되지 않았더라면 통일이 되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던 사람들의 후예인가보다.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한두발이 아니라 26발을, 그것도 ‘1차’로 투하해보자고 제안했다가 잘렸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중요치 않다.

이라크 파병의 시대에 <실미도>가 대박을 친 것을 보노라면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왜냐하면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진 것도 베트남 파병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5만 대군을 보내자 이북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휴전선의 긴장을 높였고, 급기야는 1968년 1월21일 124군부대 정예장교 31명을 파견해 청와대를 습격했다. 실미도 특수부대는 박정희가 이북의 공세에 보복하기 위해 창설한 것이다. 124군부대의 목표가 박정희의 목을 떼는 것이었듯 실미도 부대도 김일성을 직접 노리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실미도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무수히 휴전선을 넘나든 북파공작원과 구분되는 점이다.

자기 애들을 멀리 베트남에 풀어 왕보스 미국을 도와주던 동네보스 박정희에게 1·21사건은 공포와 충격, 그 자체였다. 1·21사건 이틀 뒤 이북은 미국의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원산 앞바다로 끌고가버렸다. 겁없는 이북이 이번에는 왕보스의 따귀를 후려친 것이다. 박정희는 미국에 이북을 그냥 뒀다간 버릇된다며 원산 공격 등 강력한 보복을 주문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의 구정공세로 골치를 썩고 있던 미국은 한반도에서 대대적인 군사적 보복을 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왕보스가 대북 보복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이북한테 칼침을 맞은 박정희를 두번 죽이는 일이었다.

당시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있던 미국은 성공가능성도 희박한 박정희의 어설픈 보복이 3차대전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런 미국에게 박정희는 너무 위험하고 불안하며 호전적이고 게다가 술버릇까지 고약한 존재였다. 이승만 때도 그랬지만, 미국은 한국의 군사력이 너무 약하면 이북이 밀고 내려올 것이고, 너무 강하면 남쪽이 밀고 올라갈 것을 우려했다. 이에 미국은 현 수준의 이북의 도발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미국의 지지 없이는 한국이 유지될 수 없음을 경고했다.

미국의 단호한 입장 때문에 박정희는 한국군을 동원한 보복을 꿈꿀 수 없었다. 미군 자료로 한국군에는 최소 2400여명의 잘 훈련된 특수전 요원이 있었지만 이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미군이 틀어쥐고 있는 한국군 작전지휘권이 명목상의 군통수권자 박정희의 손발을 묶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박정희는 미군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계급도 군번도 없는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며 펄펄 뛰던 박정희가 결국 자신도 멀쩡한 사람들 데려다가 미친 개로 키웠으니, 어디 결혼만이 미친 짓이랴.

시민 1천만명이 영화를 본 마당에 정부는 아직도 실미도 사건의 불행한 희생자들의 명단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 시절의 국무총리는 여전히 그들은 다 사형수, 무기수 흉악범이었다고 내뱉는다. 북에서는 비전향 장기수를 모셔다가 영웅 대접을 하고 있건만, 살아 돌아온 북파공작원들마저도 남에서는 설 땅이 없다. 당시로서는 웬만한 집 한채 값을 월급으로 준다는 ‘인생역전’의 유혹으로 스무살 안팎의 청년들을 데려다가 그렇게 만든 악마의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