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정훈이
강유원(철학박사) 2004-02-26

정훈이는 <씨네21>을 통해 뭔가를 계속해서 내보내는 이들 중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듯싶다. 사실 난 <씨네21>에서 뒤쪽에 있는 그의 만화만 볼 때가 많다. 처음 보면 재미있다. 그러나 한번 더 보면 읽을 게 많다. 그의 만화는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 그걸 다 까보는 게 만만치 않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나 이창에 피어린 절규가 실리고 예리한 통찰이 오르내려도 ‘그런갑다’ 할 뿐이다. 정훈이 만화 따라가려면 멀었다. 왜 그럴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두 페이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나는 이창의 원고를 워드 프로세서에 타이핑하여 편집자에게 보낸다. 가끔 문장을 비상식적으로 잘라보기도 하고, 길게 늘려보기도 하고,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군데군데 집어넣어 일종의 운율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부사어나 형용사로 말장난을 하기도 하고, 제목을 이리저리 비틀어보기도 하고, 글 첫머리와 끝마침을 대응시켜보기도 하고, 별별 난리를 쳐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글자뿐이다.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문장 부호만을 쓸 수 있을 뿐이다.

편집자에게 보내진 다음에는 처분만 기다린다. 굵은 글씨로 뽑아낼 문장을 뭘로 할 건지, 일러스트는 무엇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지, 글의 배치는 어떻게 할 것인지는 죄다 편집자 관할이다. 편집자는 ‘글 내용을 조금도 건드리면 안 된다’는 나의 협박을 충실히 지켜주면서도 글을 마구 주무를 수 있다. 내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정훈이가 쓸 수 있는 도구는 나에 비하면 무궁무진하다. 스토리 구성, 형형색색의 컬러, 글자 크기와 모양, 그림 배치, 군데군데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암호들, 게다가 남기남의 두꺼운 목까지. 이런 도구들을 가지고 그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총체적 이해’를 요구하는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그의 텍스트는 내가 아무리 난리 옆차기를 해도 이를 수 없는 다층적 구조에 단박에 도달한다. 당해낼 도리가 없다.

시각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해야 가장 좋은 걸까? 우선 데이터는 문자나 그림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부호이다. 모든 문자는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림은, 정교하게 그려졌다면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한계에 부딪힌다. 세상의 모든 사태를 그림으로 그려서 전달할 수 없다는 명백한 상황이 그것이다. 화장실 입구에 그려져 있는 여자그림은 여성용을 의미하겠지만, 길바닥에 그려져 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성들만 다닐 수 있는 길로 해석하면 되는 걸까? 특정 영역과 상황에서 정해진 약속을 가지고 쓰인다면 더없이 간편할 그림들- 수학문제 풀이 과정을 떠올려보라. 그걸 말로 풀어쓰자면 수학 선생들 손목이 부러질 것이다- 이 한없는 해석의 바다에 내던져질 위험은 상존하는 것이다.

정훈이 만화에 글자를 넣을 수 없다면 그는 마감의 고통과 그림의 고통을 겹으로 떠안게 될 것이다. 여기서 글자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글자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익히고 쓰는 일은 아주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한다. 가장 완성된 형태의 알파벳에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글도 글자만 익혀서는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 문장 쓰기와 읽기에는 또 다른 노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이렇게 보면 그림이나 글자는 그것들만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의 완전한 도구일 수 없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과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차피 우리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냥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기를 쓰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씨네21>이라는 종이 매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는 그림과 글자, 이 두 가지다. 어쨌든 이것 가지고 해봐야 한다.

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