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미안하게도 나는 대학로를 지날 때면 필경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모이에 길든, 뒤룩뒤룩 살이 쪄서 잘 날지도 못하는 닭 같은 비둘기들을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저건 쥐야, 쥐. 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한 공중의 쥐들이야!’ 언제부턴가 듣기 힘들게 된 ‘쥐를 잡자!’는 캠페인 슬로건이 슬며시 떠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화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평화를 쥐처럼 밑에서 갉아먹는 허연 얼굴의 인간들의 저 고상한 은유에 속이 뒤틀렸기 때문일까?
게다가 함께 가던 사람에게 그 말을 하면서 짓궂은 농담을 덧붙인 적도 있다. 저 날개 달린 쥐든, 아니면 정말 우리가 아는 고전적인 쥐든, 싫어하는 동물을 없애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고. 그것은 가령 “비둘기가 정력에 그만이래!” 하는 소문을 내는 것이다. 누군가 방송에 나와서 한마디 해주면 그 효과는 정말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농담으로 했던 것을 누군가 진지하게 실행한 사람이 있는 듯하다. 그는 비둘기가 아닌 까마귀를 선택했다. 사실 까마귀야 검고 흉한 몰골에 기분 나쁜 울음소리로 인해 ‘불길한 동물’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에게 죽음 내지 시체가 인접해 있음을 상기시키는 기능을 반복해서 부여받지 않았던가. 진지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는 분명 이런 상식에 충실했던 듯하다. 덕분에 까마귀는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한 마리에 40만원씩 팔리고 있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다. 그 사람의 평범한 상상력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왕이면 쥐나 비둘기처럼 수가 많은 동물로 하지….’
그러면서도 한편에선 괜스레 뜨끔해졌다. 이미 거의 다 죽어버려 오직 지구상의 허공을 떠돌고 있던 코뿔소나 물개의 원혼들이 알아들었다면, 내 죽어서 저승길이 편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쨌건 ‘정력에 좋다’는 문장은, 적어도 한국에서라면, 모든 동물에게 주어지는 최악의 사형선고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잘 알고 있다. 어떤 것을 성대하게 번식하게 하려면 그것이 ‘돈이 된다’는 소문을 내면 된다. 아마도 쥐가 돈이 된다고 하면 여기저기 쥐를 키우고 양육하는 농장이 생겨날 것이고, 피가 돈이 된다는 게 알려지면 논은 벼가 아니라 피를 키우는 ‘피바다’가 될 것이 틀림없다. 어디 살아 있는 것뿐이랴! 누가 소문을 냈는지, 요즘은 이메일 쓰려고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여배우 누드집과 ‘몸짱’, ‘얼짱’ 등 돈되는 신체들의 얘기들이 눈앞에 가득 찬다.
그러나 ‘돈이 된다’는 말은 돈이 되는 것만을 저렇게 번식시키지만, 대신 ‘돈 안 되는 것’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십여년 전, 그저 도시에서만 자란 나도 여러 가지 사과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또 실제로 먹을 수 있었다. 홍옥, 국광, 인도, 스타킹, 아오리, 후지 등등. 나는 그중에서도 홍옥을 가장 좋아했었다. 단맛과 신맛, 쓴맛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맛, 그리고 맛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향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젠 그것을 먹을 수 없다. 지난해까지 3∼4년은 일부러 홍옥을 사려고 해보았지만, 거의 살 수가 없었다. 이유는 ‘돈이 되는’ 사과인 후지가 사과계를 평정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돈이 된다’는 말은 ‘정력에 좋다’는 말만큼이나 끔찍한 사형선고인지도 모른다. 다만 차이는 ‘정력에 좋다’는 정력에 좋은 것만 죽인다면, ‘돈이 된다’는 돈이 안 되는 모든 것을 죽인다는 점이다. 어떤 게 더 끔찍한 선고일까?
그러나 까마귀라면 이러한 대비가 너무 피상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까마귀가 죽는 것은 ‘정력에 좋다’는 선고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이유로 인해 ‘돈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니까. 돈이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번식시키지만 그것마저 사실은 모두 죽이기 위한 것이니까. 이런 걸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하던가? 돈, 그것은 이제 정력제마저도 삼켜버린, 이 시대 최고의 사신(死神)이다. 묵직한 검은 코트 대신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입은.이진경/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