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다 알면서

한, 십년 전쯤의 일인데, 어느 날 이런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덜컥, 올랐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울컥, 유치원을 나오지 못한데다, 벌컥, 자네가 아는 게 뭔가? 라는 상사의 호통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몰래 책을 사고야 말았다. 책은 어디선가 몰래 유치원을 차렸을 것 같은 미국인이 쓴 것이었고, 내용은- 유치원을 안 나온 나 역시도 뻔히 알고있는 것들이었다. 뭐야, 다 아는 거잖아. 강제로 피망을 씹어넘긴 유치원생처럼, 나는 억울하고 억울했다.

십년이 지난 뒤 나도 책이란 걸 내게 되었다. 이미 누구나 유치원을 다니는 세상인데다, 사람들은 10년 전에 비해 한결 똑똑해져 있었다. 게다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의 네이버 지식 in이 있질 않나, 나 원 참, 작가와 감독과 뮤지션들의 의도를 훤히 꽤 뚫는 저 무수한 리뷰와 리플들… 나는 두려웠다. 도대체 뭘, 써야 할까? 도대체 뭘, 써야 하지? 어디서 몰래 유치원이나 차리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둘러보니, 인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굳이 유치원을 나오지 않아도, 말이다.

석가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예수의 교훈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어떤 말을 했는지, 펄 벅이 어떤 글을 썼는지는 물론이고, 커트 코베인이, 혹은 하루키가 한 말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아이슈타인은… 어쨌거나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이고, 또 모르면, 네이버 지식 in에 물어보면 되니까, 해서 우리는 모든 걸 알고 있거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미래조차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신이 온갖 재앙을 내린다 해도 아하, 이거 요한계시록에 있는 거지. 어느 날 우리의 세계가 가상이었단 사실이… 밝혀지면 뭐해, 매트릭스를 봤는데. 핵 때문에 파멸이 닥친다는 건 유치원에서나 떠들 법한 일이고, 어느 날 외계인이 올 수도… 내 그럴 줄 알았지 이며, 그 외계인이 기껏 공들여 광선을 쏜다 해도, 화성침공 본 지가 언젠데 이고, 하물며 아무 일이 없다 해도, 몸짱이 되는 십계명을 줄줄 외며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할 테지. 인간은, 인류는 말이다. 알고보니, 생물학자 만프레트 아이겐은 이미 오래전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겼었다. “지식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리 없다.” 굳이 만프레트 아이겐이 아니어도, 나는 피망의 맛을 음미하는 노신사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발견되지 않은 지식은 없다. 인간은, 인류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인류는 성경을 읽고 불경을 외며, 이를테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같은 책을 사고 또 산다. 다 알면서, 나 같은 인간이 쓴 책을 읽어주고,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이런저런 것이 아니었나요?”라고 빤히 쳐다보며 물어보고, 다 알면서, 소에게 계속 동물성 사료를 먹이질 않나, 다 알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타인을 착취한다. 다 알면서, 연속극을 연속, 해서 보고, 다 알면서, 또 누가 누드를 찍었다 하면, 우르르, 돈을 들고 몰려간다. 다 알면서, 인종과 민족을 차별하고, 다 알면서,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을 뽑고 또 뽑으며, 다 알면서, 여자와 아이들을 학대한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우리는 대체 뭘 알고 있는 걸까?

깜박했는데, 만프레트 아이겐은 이런 말을 덧붙였었다. “이제 우리는 지식을 갖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다.” 아빠, 날 사랑해? 다… 알면서. 유치원 버스에 오른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나는 말한다. 덜컹이며, 저 노란 유치원 버스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아마도 당신은, 다 알고 있겠지. 다, 알면서.

박민규/ 무규칙이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