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here 1997년, 감독 그렉 아라키 출연 제임스 듀발 장르 드라마
파워 오브 무비 명불허전
“LA에 사는 사람들은 길을 잃은 방랑자들뿐이다.” 토드 헤인즈와 더불어 90년대 하위문화와 게이컬처의 대표주자라 평가받았던 그렉 아라키의
97년작 <아무데도 없는 영화>는 그의 냉소가 잔뜩 묻어 있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리곤 몽환적인 음악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
다크가 샤워실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다크는 여자친구 멜의 자유분방한 연애관에 의기소침해 있다. 그런데
몽고메리라는 남학생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그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다크를 황당하게 만드는 일은 다른 데서 발생한다.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이 그의 친구들을 죽이거나 납치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외계인은 다크의 눈에만 보인다. 여자친구의 외도와 갑자기 출몰하는 외계인
때문에 다크는 잔뜩 불안한 상태인데, 한밤에 벌어진 친구의 파티에선 살인까지 벌어진다. 그리고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한 남자친구 몽고메리는
외계인에게 납치됐다 돌아오더니 바퀴벌레로 변해버린다.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이 영화는 그렉 아라키의 ‘묵시론적 틴무비 3부작’의 세 번째 영화이다. 두편의 전작 <완전히 엿먹은>(Totally
Fucked Up), <둠 제너레이션>(Doom Generation)과 더불어 그렉 아라키는 <베벌리힐즈 아이들>류의
주류 틴에이저 영화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로 응수한다. 90년대 LA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10대 아이들의 일탈적인 하위문화와 키치적 감성을
마약과 섹스, 폭력이 뒤섞인 언어로 쏟아놓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에이즈에 대한 공포나 종교화된 미디어, 지배적인 성윤리에 대한 코드들은
모두 풍자와 조소의 대상이 된다. 결코 기성세대 혹은 주류문화와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10대의 일탈된 욕망과 공상들을 마치 앤디 워홀의
콜라주된 이미지들처럼 재배열하고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한편 그렉 아라키의 영화적 도발은 종종 재기발랄함과 신선함을 넘어서 다소 과잉되거나
지나치게 희화화하는 바람에 오히려 그 의미를 상실하곤 한다. 특히 3부작의 마지막인 이 영화의 뒷부분,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한
결론에 이르면 ‘도대체 뭘?’이라는 허탈감마저 생기니 말이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생기는 진짜 허탈감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심의를 이유로 주요 장면들이 지나치게 잘려나간 탓에 영화가 더욱 기괴해보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출시될 때마다 수난을
당하는 그렉 아라키의 영화제목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 영화의 원제 ‘노웨어’(nowhere)가 어떻게 ‘아무데도 없는 영화’로 돌변해버릴
수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그의 전작, 는 ‘키싱 투나잇’으로 출시되었다).정지연|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