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은 참 대단한 인간들이다. 텔레비전 쇼에 나와 우는 연기를 해보라고 요청하면 정말로 단 몇초 만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이들 중 어떤 이는 가끔 극을 벗어나 현실에서, 가령 기자회견 같은 걸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그 배우가 실제로 우는 순간에도 (아주 조금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절절한 눈물 속에 섞인 연기의 함량은 몇 %일까?
정치에도 눈물이 있던가? 언젠가 텔레비전에 비친 ‘노짱’의 얼굴에는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겠다고 했던 그는 집권 1년 만에 벌써 측근비리로 특검을 받고, 검은돈의 불량한 질에 대한 공격을 10분의 1이라는 비교적 양질의 수치로 방어하고 있다. 듣자하니 대통령 백으로 수십억원의 돈을 펀딩하는 데에 성공한 그의 인척 중의 하나는 사기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눈물로 선전하던 순도에 비하면 성적표가 상당히 불량한 편이다.
노짱의 뺨에 흐르던 그 눈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 특유의 이미지 정치를 완성하느라 카메라를 위해 흘린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그토록 지지해준 국민들의 성원에 대한 진정한 감동의 생리적 표현이었을까? 호의적으로 해석해 후자라고 본다면, 적어도 국민이 그를 감동시킨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거꾸로 그가 국민을 감동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이제야 드러난,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말하던 ‘감동의 정치’의 실상이다.
이번엔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눈시울을 적시는 사진이 뉴스 사이트에 올라왔다. 노동자가 분신을 해도 뽀득뽀득 말라 있던 눈이다. 농민이 음독을 해도 말똥말똥 굴러가던 눈이다. 서민들이 투신을 해도 맹송맹송 시큰둥했던 눈이다. 도대체 그 메말라 척박한 눈을 촉촉히 적신 가뭄 끝 단비와 같은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듣자 하니 수뢰혐의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던 어느 공직자의 자살이라고 한다. 평소에 아끼고 아꼈던 그 고귀한 눈물을 기껏 어느 수뢰 혐의자를 위해 흘린 것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즉각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겠단다. 수많은 억울한 죽음에도 결코 움직이지 않던 그 집단이, 뇌물은 받되 수사는 받기 “피곤”했던 이를 위해 즉각 앙가주망에 나섰다. 진상 밝히기 싫어 자살한 사건. 그 사건의 진상을 굳이 밝힌 건 뭔가? 더 우스운 것은 부산시다. “시장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장례를 부산광역시장으로 치를 것이라고 한다. 그 동네는 윤리의식이 많이 다른가? 이 정도면 거의 블랙코미디다. 대체 시장님의 뭘 기린다는 말인가. 공직자로 하여금 뇌물을 못 받게 하는 불합리한 제도에 죽음으로 맞선 저항의 정신?
‘열사’가 났다. 하긴, 한나라당은 이제까지는 주로 남을 열사로 만드는 일만 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차에 이번에 직접 ‘열사’가 났으니, 이를 경축하고 싶었던 걸까? 마르크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정말로 역사는 두번 반복되는 모양이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옥중 자살에, 고귀한 눈물에, 범시민 사회장에, 의회 차원의 진상조사단. 운동권 열사 문화를 그대로 패러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과거에 비극이었던 것이 이제는 웃지 못할 희극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 총선 때문이다. 이미 차떼기 당으로 낙인 찍힌 몸. 한나라당으로서는 검찰수사가 출구조사로까지 이어지면 선거 치르는 데 애로가 많을 것이다. 최 대표의 고귀한 눈물은 검찰에 보내는 무언의 시위다. ‘무리 수사 정치검찰, 안 시장을 살려내라!’ 애먼 검찰이 무슨 죄가 있는가. 표적은 그 위에 있다. ‘죽은 자는 알고 있다, 현 정권의 야당탄압!’ 모든 구호는 실천적 슬로건으로 모아져야 한다. 국민을 향해 내지르는 절절한 실천의 호소. ‘안 시장 뜻 이어받아, 노무현 정권 심판하자!’
이거야 머리가 달린 자 누구나 다 아는 얘기. 정작 내가 궁금한 것은, 앞으로 저들의 눈이 쏟아놓을 분비물 속에서 사적으로나마 죽은 이를 진정으로 기리는 액체는 몇 밀리리터나 될까 하는 것이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