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은 귀로 들어서 아는 것 보다는 눈으로 보는게 낫다는 말이다. 과잉해석을 해보자면 청각 데이터에 대한 시각 데이터의 우월함. 듣는 것과 보는 것 -- 둘 다 우리가 뭘 알아내는 출발점인데 보는 것이 이긴다. 내 눈으로 봤다는데 어쩔거야.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서양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진리로 여겼다고 한다. 비가시적인 것의 진리성. 그것을 흉내낸 어떤 것도 그림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고 확실하게 장악하는 수단이 되면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진리이길 멈추지 않았나 싶다. 아니, 진리는 아예 무의미한 말이 되었고,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가지고 살아가도 별로 지장이 없는 세상이 온지도 제법 된건 아닌가. 진리가 밥먹여 주나. 확실한 것 몇 가지만 있으면 되지.
'정보 처리'라는 말이 있다. 정보가 별로 많지 않으면 굳이 '처리'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저기 쌓아두었다가 필요할 때면 후딱 찾아서 쓰면 될테니까. 많아지니까 데이터베이스니 뭐니 해서 처리방식을 고민하게 된다. 처리 대상이 되는 데이터의 상당수는 눈으로 보아서 아는 정보들이다. 시각 데이터의 홍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원활하게 이루어지느냐는 이러한 시각 데이터를 얼마나 잘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티브이 오락 프로그램에는 화면에 자막이 나온다. 출연자가 하는 말이 외국어가 아닌데도 자막이 나온다. 습관이 되어서인지 이제 그들이 하는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자막만 보게 된다. 자막이 없는 드라마는 시청이 힘들다. 크게 틀어 놓아도 여간해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가는 귀를 먹은 걸까. 텍스트 중독에 걸린 걸까. 눈으로 정보가 들어와야 제대로 뭘 이해했다는 습성에 몸에 밴걸까.
자막은 단순한 사례일 뿐이다. 우리 주위는 온갖 시각 데이터로 가득 차 있다. 텍스트들, 이미지들... 우리의 눈에 들어와 박히고 그것을 뇌에 원활하게 전달하려고 갖은 아이디어와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타이포그라피, 로고 디자인, 편집 디자인 등을 다루는 시각 디자인이 이 과정에서 한 몫한다.
문자나 이미지나 아무리 생동감있게 그려지고, 아무리 눈에 띄는 색을 쓰고, 아무리 배열을 잘했다해도, 우리의 경험을 그대로 되살리려는 재현 체계들은 끊김없이 흐르고 있는 우리의 경험을 냉각시키고, 평면에 가두어 버린다. 말을 할 때는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데 글은 온갖 문장 부호로 가득차 있다. 정교하게 고안된 재현체계라해도 결국 그것이 재현하고자 하는 것을 왜곡하고 마는 것이다. 인쇄술의 발명은 이러한 과정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우리가 끊임없이 언어부족에 시달리는 것도, 단어가 모자라서이기도 하지만, 언어가 우리의 경험을 다 담아낼 수 없다고 하는 언어 자체의 한계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일들은 본질적으로 평면 공간 위에 죽은 문자와 이미지로 고정시킬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에는 굴곡이 있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 시각만이나 아니라 청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 기관이 총동원되어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속 속에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영상 데이터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평면에 펼쳐지는 시각 중심의 우리의 재현 체계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그래도 이것 밖에 없다면 뭔가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보아야 하는건 아닐까?
강유원/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