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야마 마사모리와 야키야마 요시히로. 일본 오사카 태생의 29살 동갑내기 청년들이다. 도쿠야마는 슈퍼플라이급 남자권투 세계 챔피언이고, 야키야마는 일본 남자유도 81㎏급 국가대표 선수다. 도쿠야마는 조인주를 꺾고 세계 챔피언이 됐고, 야키야마는 부산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안동진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그들이 한국인을 물리칠 때마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도쿠야마는 홍창수, 야키야마는 추성훈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날, 바닥에 배를 깔고 채널을 돌리다 MBC-ESPN에서 기묘하다면 기묘한 장면을 보게 됐다. 기모노를 입은 라운드걸이 북한 노래 <조선은 하나다>에 맞춰 링을 돌고 있었다. 1월3일 오사카에서 열린 홍창수 선수의 8차 방어전이었다. 녹화 방송인 줄도 모르고 넋 놓고 싸움 구경을 했다. 지루한 경기 끝에 홍창수의 판정승. 그러나 경기보다 경기 외적인 요소가 더 재미있었다. 조선적 청년 홍창수의 트렁크에는 어김없이 ‘One korea’가 박혀 있었다. 그런데 머리 색깔은 노랗다. 레드 콤플렉스의 나라에서 살아온 내게 노란머리의 (조)총련계 청년이란 마치 형용모순처럼 느껴진다. 그의 낯선 외모 속에는 총련계 동포사회, 특히 2세, 3세들의 정체성이 녹아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라는 ‘풀네임’을 가진 총련사회는 일본사회 속의 섬이다. 꼬아서 말하면, 고도 자본주의 속의 봉건사회, 뭐 그쯤으로 생각된다. 총련계 아이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학교에 다니고, 총련계 신용조합에서 돈을 빌려 장사를 한다. 정과 이념과 돈으로 얽힌 끈끈한 공동체인 셈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이기도 해서 X-재팬을 모를 리 없고, 미야자키 하야오를 싫어할 리가 없다. 홍창수의 노란머리는 이런 불협화음 혹은 기묘한 조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 봉건적 공동체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같은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본국에서 식민지 출신의 소수자로 살아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들은 이지메의 위협 속에서도 ‘본명 선언’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홍창수가 “링에는 38선이 없다”는 멘트를 ‘날리는’ 센스도 그 자존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또한 나는 이들을 연민한다. 불행히도 그들의 조국이 현실에서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의 패배를 바다 건너에서 그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분단의 진정한 희생양일지 모른다. 하지만 홍창수의 링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한다. ‘조선인’ 홍창수가 기모노의 여인을 링에 세운 것처럼, 재일동포 2세, 3세들이 일본을 ‘또 하나의 조국’으로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지난해 9월 같은 채널로 본 추성훈의 일그러진 얼굴도 잊을 수가 없다. 세계유도선수권대회 81kg 준결승, 일장기를 가슴에 단 청년이 목조르기를 당하고 있었다. 얼굴이 핏빛으로 변해도 청년은 기권하지 않았다. 겨우 목조르기를 빠져나왔지만, 이미 청년의 몸은 탈진상태였다. 아쉬운 판정패. 하필이면 그의 고향 오사카에서였다.
오사카는 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사는 도시다. 이념으로 나뉜 동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등돌리고,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던 비애의 도시이기도 하다. 옛날 그 도시의 거리에서는 민단과 총련으로 나뉜 동포청년들 사이에 칼부림이 나기도 했다. 그 한서린 도시에서 추성훈이 금메달을 따기를 간절히 응원했다. 추성훈이 일장기를 달게 된 사연 또한 각별하기 때문이다.
한때 추성훈은 한국 대표선수를 꿈꾼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재일동포 청년에게 태극마크를 허하지 않았다. 한국 유도계의 텃세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태능선수촌의 훈련 방식은 그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그는 일본 귀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부산아시아 경기대회에서 한국 대표 안동진을 물리쳐 실력을 입증했다. 이 재일동포 청년에게 한국 관중은 야유를 퍼부었고, 일부 언론은 ‘조국을 메쳤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귀화 이유를 묻는 한국 언론의 집요한 추궁에 “나의 유도에 맞는 나라를 선택했을 뿐”, “유도에는 국적이 없다”는 쿨한 말로 응답했다.
나는 이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청년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추성훈 아니 야키야마 요시히로 선수가 떳떳하게 일장기를 달고 아테네올림픽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장면을 보고 싶다. 홍창수 혹은 도쿠야마 마사모리 선수가 그의 바람대로, 비무장지대에서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더 많은 재일동포 2세, 3세 젊은이들이 불행한 역사를 딛고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조국은 하나일 수도 있지만, 여러 개일 수도 있다.신윤동욱/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