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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블루 사이공>

1996년 처음 막을 올린 <블루 사이공>은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들을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로 불러낸 작품이다. 수억원의 누적적자를 감수하며 김 상사의 이야기를 말하던 <블루 사이공>이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전쟁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왔건만, 너무나 쉽게 이라크 파병이 국익의 이름으로, 한-미동맹의 이름으로 결정되는 현실에서 숨이 막히기도 한 듯싶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지만 우리에게는 베트남전쟁이 완벽하게 잊혀진 전쟁이었다. 1975년을 해방과 통일의 원년으로 기억하는 베트남 사람들과는 달리 1975년은 우리에게 월남이 ‘패망’한 해였다. ‘월남패망’과 더불어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들의 이야기도 우리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정작 새까맣게 타버린 것은 김 상사의 살갗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것을 우리가 깨달은 것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용산의 웅장한 전쟁기념관이 상징하듯 한국의 공식 역사에서 전쟁은 ‘기념’해야 할 것이었다. 그 공식 역사의 장에는 고엽제도, 라이따이한도, 참혹한 전투의 정신적 충격으로 고통받는 참전용사들이 설 자리도 없다.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은 말할 것도 없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용감한 따이한 병사들이 공산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며 국위를 선양하고 국익을 증진시키고 있다.

1996년 처음 막을 올린 <블루 사이공>은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들을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로 불러낸 작품이다. 그들을 월남에 보낸 박정희가 18년, 그뒤를 이어 월남에서 무공을 세워 승승장구했다는 전두환, 노태우가 12년간이나 대통령을 해먹은 나라에서 우리가 정말 오랜만에 만난 김 상사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김 상사만이 아니었다. 김 상사가 북에 두고 온 자신의 고향 주소를 따서 이름지은 라이따이한 아들 김북청은 아버지의 나라에 와서 이주노동자가 되어 체불임금을 받으려다 살인자가 되었고, 한국인 딸 김신창은 고엽제의 후유증을 대물림하여 아파하고 있었다. 김 상사는 그 자신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조국의 이름으로’ 월남의 정글에 내동댕이쳐졌다. 화려한 출병식만 있었을 뿐 아무도 그에게 월남전은 어떤 전쟁이고,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한명이라도 더 김 상사의 잊혀진 삶과 대면시켜보려고 수억원의 누적적자를 감수해온 극단이, 그리고 출연료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택시기사 등 딴 데서 돈벌어다 여기에 퍼부은 배우들이 이번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블루 사이공>을 무대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김 상사도 쉬어야지요, 이제 그만 보내주고 싶어요”라 쓸쓸히 말하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미친 듯이 전쟁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왔건만, 너무나 쉽게 이라크 파병이 국익의 이름으로, 한-미동맹의 이름으로 결정되는 현실에서 숨이 막히기도 한 듯싶다.

고맙게도 극단쪽은 <블루 사이공>의 마지막 공연을 평화박물관 건립운동과 함께하기로 했다. <블루 사이공>이 주로 우리에게 남겨진 전쟁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노래해왔다면,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의 모태가 된 베트남전진실위원회는 “미안해요 베트남”이란 표어에 함축되어 있듯이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가한 전쟁의 고통에 대한 사죄 운동을 해왔다. 또다시 어떤 미래의 고통이 기다릴지 모를 머나먼 이라크에 우리 젊은이들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또다시 “미안해요 이라크”란 말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블루 사이공>은 고별 공연을 준비 중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때일수록 <블루 사이공>을 더 많이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작가 김정숙씨는 고개를 젓는다. 예닐곱 어린 나이에 철없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맹호부대, 청룡부대 노래를 불렀던 아이가 30대 중반이 되어 그때의 김 상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돌아보며 만든 작품이 <블루 사이공>이었다. 이제 40대 중반에 졸지에 파병국가의 국민이 되어 아들 같은 젊은이들을 이라크의 사막으로 보내야 하는 그가 느끼는 책임은 남다르다. 침략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을 짓밟으며 국익과 한-미동맹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거품을 무는 자들이 지지 않는 파병의 책임을 전쟁의 아픔을 노래해온 사람들이 지려고 한다. 20세기 초 나라가 망할 때 초야의 이름없는 선비들이 목숨을 끊어 역사 앞에 조금이나마 책임을 지려 했던 처연한 장면만 오버랩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