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rima
Angelica 1974년,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 출연 안토니오 카날
EBS 6월2일(토) 밤 10시
스페인영화, 하면 자연스럽게 비극적인 정조를 떠올리게 된다. 원색의 화면과 구슬프기 그지없는 음악, 그리고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조의 대사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영화를 나열해보면 이런 기준에서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안나이야기>나
<택시> 같은 작품은 범작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도 사실. 하지만 그것이 카를로스 사우라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감독의 영화적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은 1970년대였다. 당시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프랑코 독재정권하에서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를
만들곤 했다. 정치적인 억압과 영화검열이라는 환경 속에서 그는 역사에 관한 피해의식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 즉 <사촌 안젤리카>나
<까마귀 기르기> 등의 수작을 만들었다. <사촌 안젤리카>는 당시 칸영화제 수상으로 사우라 감독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여행담을 다루고 있다. 바르셀로나에 사는 루이스는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고향에 내려간다. 세고비아에 도착한 루이스는 오랜만에
대하는 풍경들이 낯설기만 하다. 고향은, 어머니에 관한 추억들은 루이스의 기억속에서 어린 시절의 일들을 하나둘씩 불러낸다. 그의 기억엔 기묘한
끊김이 있다. 특정한 끊김의 ‘시간’이란 루이스에게나 감독 개인에게나 가장 끔찍했던 시간, 즉 스페인 내전 기간을 의미한다. 사촌 안젤리카도
그 가려진 기억 속에 잠겨 있었다. 안젤리카 이야기를 사람들과 주고 받으면서 루이스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긴다. 되살아오는 그 1930년대 앞에서
루이스는 점차 힘겨움을 느낀다. 폭압적인 정치상황, 그리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다시금 루이스를 괴롭히는 것.
<사촌 안젤리카>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정신적 내상에 관한 영화다.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특정한 인물의 내면 속에서 시간이 어떻게
굴절되어 있는지, 그리고 현재까지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펼쳐보인다. 영화에서 시간은 때로 역전되고 장면은 급작스럽게 앞시제로
되돌아가곤 한다. 음악에서 도돌이표가 같은 마디를 반복하듯. 그렇다고 해서 내러티브 장치의 일종인 플래시백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스페인 내전이 남겨놓은 상흔을 바로 지금의 일인 양 절실하게 각인시켜준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이전에 만들어진 다른 영화의 결과물이다.”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말처럼 <사촌 안젤리카>는 감독이 비슷한 시기에
만든 작품들과 많이 닮아 있다. 종교적인 상징이나 폭력의 야만성을 논하는 점이 흡사하다. <사촌 안젤리카>의 종결부는 돌연하다.
무자비한 폭력과 한 소녀가 아무렇지 않게 머리빗는 일상을 병치함으로써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피해의식에 잠겨 있는 인물 군상의 비극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선 매너리즘의 기운마저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적어도 당시 사우라 감독은 ‘현재로서의 역사’에 관한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었던 셈이다. 김의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