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고향을 찾는 시간이다. 마치 습관처럼 찾아오는 시간, 아니 습관처럼 찾아가는 공간, 거기에 우리는 ‘고향’이라는 정겨운 이름을 붙인다. 귀향, 선물을 싣고, 선물보다 먼저 가는 마음을 싣고 고향으로 향하는 거대한 흐름들. 그러나 정작 고향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고향가는 길이 정겹다기보다는 ‘끔찍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도 고향에 가야 한다. 그건 일종의 의무와도 같은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평생을 ‘상실된 고향’을 화두로 삼아서 사유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서 고향을 빼앗아버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굳이 하이데거를 빌릴 필요는 없다. 일자리의 유혹, 돈의 유혹, 화려한 불빛의 유혹, 혹은 문명이란 이름의 도시적 삶의 유혹 등등. 이로 인해 어디고 할 것 없이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삶과 고향 사이에 거대한 거리를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저 유혹 때문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유혹보다는 차라리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도시로, 혹은 낯선 땅으로 향했다. 자본주의는 어디서든 사람들을 토지로부터, 먹고살던 땅에서 쫓아내는 데서 시작했다. 양을 키우기 위해 농사짓던 사람들을 내쫓기도 하고, 공유지를 사유화하기도 하면서, 내 땅이란 생각도 없이 그저 농사짓고 먹고살던 사람들을 쫓아내버렸다. 자본주의는 어디서든 거대한 유랑자의 물결과 함께 시작된다.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로부터 몇십년 뒤 서울로 서울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고향을 등지면서, 고향을, 친숙하고 익숙한 땅을 잃었다.
자의 반 타의 반, 고향을 등져야 했던 시절에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고향은 항상 잃어버린 낙원으로 표상되었다. 심지어 나처럼 고향 없이 태어난 사람들, ‘도시의 자식들’조차 고향에 대해 그리워하고 고향의 정겨움, 고향의 편안함을 표상하게 되었다. 매년 두 차례 고향을 찾아가는 저 끔찍한 귀향에 대해서조차 경의와 애정을 표시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갖고 산다. 이런 점에서 ‘고향상실’을 안타까워하고, 그런 사태의 극복을 꿈꾸었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 동질화된 세계 ‘내부’에 거주하는 것에 대한 향수어린 찬사로 바뀌고, 그 익숙한 세계의 편안함을 방해하는 ‘외부’의 이질적 요소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 순간, 그리고 고향상실에 대한 분노가 그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끼어드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 순간, 고향은 문학의 대상에서 정치학의 대상으로 바뀐다. 그것이 종종 타자들, 이질적인 외부인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 혹은 폭력적 가해와 핍박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20세기의 역사만 뒤져도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동질적인 세계, 외부인들 없는 세계에 대한 오래된 꿈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외부적인 모든 것을 타자화함으로써만 가능한 세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고향을 잃고, 고향 같은 ‘조국’에서 쫓겨나 외지를 방랑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사람의 책에서 읽은 한 인용문이 더욱더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것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차라리 고향 없는 귀향이, 고향에 대한 낭만적 향수는 모두 잃어버린 채 그저 의무처럼 고향으로 향하는 귀향이 차라리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