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를 가리킬 때는 흔히 ‘포디즘’이라는 말을 쓴다. 포드주의는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과 결합하여 대량생산 시대의 대표적인 시스템으로 자리잡는다. 과학적 관리법의 핵심 내용은 노동자의 동작을 표준화하고 기준점에 근거하여 성과급을 차등 지급한다는 것이다. 생산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을 단순한 단위로 쪼개고, 노동자는 그것을 몸으로 행하기만 하면 되며,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따라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생각은 경영자가 하고 노동자는 몸만 쓰게 만든다.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이 성공하려면 일관 작업에 적합한 노동자 유형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람시의 <옥중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형태의 문명과 새로운 형태의 생산, 새로운 형태의 작업에 적합한 사람들을 선별, 혹은 ‘교육’하는 일은 믿을 수 없도록 잔인한 방식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허약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부랑계급들의 감옥으로 보내지거나 전적으로 제거되거나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잔인한 방식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일종의 ‘훈련된 원숭이’가 되었다. 그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 만들기, 단란한 가정생활 꾸려가기 등과 같은 새나라의 어린이 노래를 끊임없이 불렀다. 국가는 자본이 조직된 노동자들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노동자들이 일 안 하고 까분다 싶으면 곧바로 경찰을 투입해서 생산 현장으로 집어넣었다. 조직화된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예비 노동자들에게는 군대생활이라는 경험을 미리 쌓게 했다. 조직된 노동자로 만드는 일에는 학교도 나섰다. 매주 월요일이면 운동장에 줄을 세워 보건체조도 하고 교장선생님 훈화도 서서 듣는 훈련을 미리 시켰다.
조직화는 일관 작업대에서 일하고 있는 블루 칼라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책상에서 펜대를 굴리는 화이트 칼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본가가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는데 화이트들은 블루 앞에서 거들먹거렸다. 어차피 그들 모두 회사라는 자본 축적의 기구 속에서 소모되는 육체덩어리였을 뿐이다. 기억하자! 생각은 경영자가, 노동자는 몸만 제공할 것.
1970년대를 지나 이른바 자본의 유연한 축적 시기, 즉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을 쌓아가는 시기에 접어들면서 노동과정은 탈조직화의 모습을 보인다. 대규모 조직이 대량으로 상품을 만들어내던 시기가 지난 것이다. ‘리엔지니어링’, ‘다운사이징’과 같은 신조어들이 등장했다. 그에 이어 지식경영이니, 지식 기반사회니 하는 말들이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문필가들은 세상이 모던을 넘어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낙원이 왔다고 떠들기도 하였다.
자본의 축적 방식이 바뀌면서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를 만들어내려는 잔인한 방식이 다시 시도되었다. 이번에는 조직화가 아니라 해체- 해체! 어떤 철학자와 그의 똘마니들이 아주 즐겨쓰던 말- 였다. 블루건 화이트건 죄다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회에는 언제든 불러주기만 하면 아무런 복지혜택없이 단기 계약으로 기꺼이 열심히 일할 노동 예비군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냥 취직만 된다면 좋겠다는 사람들투성이가 되었다. 회사에 남아 있는 자들도 역시 예비 실업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노동과정도 바뀌었다. 인터넷을 이용한 재택근무와 언제 어디서나 회사에 접속할 수 있는 첨단 시스템이 무슨 천국의 열쇠라도 되는 양 선전되었지만, 그건 따지고 보면 24시간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먹으면서 모든 이가 쉴새없이 일하라는 명령일 뿐이었다. 지식경영을 한답시고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교육시켰지만 그건 몸에 이어 머리까지 빨아먹으려는 전술의 일종이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기억해야 한다. 생각은 경영자가, 노동자는 몸만 제공할 것. 아니 머릿속까지 내놓을 것.
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