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것은 거칠거나 평화롭거나 지루하거나 위태로운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거친 파도와 폭풍우와 싸워 이겨야 하고, 끝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절망감을 견뎌내야 하고 깨어서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기도 해야 한다. 인생이 시작도 끝도 없는 망망대해로의 항해라면 집은 한척의 방주方舟처럼 내 인생을 싣고 험한 세상을 흔들리며 건너간다. 집은 가가호호 저마다의 항해력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어떤 풍파를 견뎌냈는지, 얼마간의 새 생명이 나고 또 늙어 돌아갔는지,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내력이 집이라는 방주의 항해력이다. 방주方舟는 직역하면 네모진 상자모양의 배라는 뜻이다. 방주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기독교의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세상을 멸하실 때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고 세상을 심판하는 날 홍수를 피하여 그 방주 안에 노아의 가족과 땅 위의 모든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살아 있는 것들이 암수 둘씩 방주로 들어가 생명을 보전하였다는 기록이다. 이와 유사한 대홍수 심판과 방주를 이용한 생명 보존의 전설은 고대 바빌론과 이집트, 인도, 중국 등 거의 전세계의 문화에 걸쳐 공존하고 있고 내용도 서로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일례로 한자 배 선船 자는 배 주舟에 여덟 八명의 사람 口이 합한 뜻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아의 방주에 승선한 노아의 가족들이 여덟명이었던 전설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인도전설에는 소어(비슈누신의 화신)의 예고에 따라서 배를 만들어 난을 면한 마누가 인간의 선조가 된다. 이렇듯 인간사에 가장 큰 환난이 닥쳤을 때 그 구원의 탈출선으로서 방주가 등장하는데 그 상징성은 모두 공통적으로 생명을 보호하고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함으로써 구원, 자궁, 생명 보존, 안정, 소우주 등을 상징한다. 그런데 왜 구원의 배는 일반적인 형태인 유선형이 아니고 네모난 배-방주였을까. 그 이유는 생명을 싣는 방주는 배라기보다 ‘물에 뜨는 집’인 까닭이리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을 실어 나르는 배는 창세기에 여호와께서 직접 제도하셨듯이 ‘칸이 나뉘어진 각 방이 층층이 있고 창과 문을 갖춘 일종의 다가구 주택 같은 구조’이어야 마땅한 것이었으리라. 구원방주는 배가 아니라 집이다. 집은 또 하나의 ‘약속의 상자’(Ark of the Convenant)가 아니던가. 오늘도 바깥에는 거센 폭풍우 같은 세상사가 파도치며 낡은 것들이 떠내려가고 있고, 약한 것들이 멸종하고 있다. 나는 나의 구원방주 안에서 암수 한쌍으로 숨죽이고 살아 있다. 종말의 풍경은 집 바깥이고, 탄생은 역사는 집 안 일이다.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