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흥미로운 사이트 하나를 발견했다. ‘아이디어회관 SF 직지 프로젝트 1999.’ 사이트 소개를 보니 “한국의 SF 고서를 모아 CD-ROM으로 만드는 작업인 ‘직지 프로젝트’는 1999년 3월20일 시작되었습니다. ‘직지 프로젝트’는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순수한 아마추어들이 모여 다음 세대에게 우리 세대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꿈을 물려주는 작업입니다. ‘직지 프로젝트’는 1년 동안 많은 분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진행되었으며, 2000년 5월5일 어린이날 성공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제목처럼 이 사이트는 70년대 ‘아이디어회관’이란 출판사에서 아동용으로 나왔던 60권짜리 SF전집을 중심으로 복각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사이트를 발견하고 ‘작품 읽기’로 들어가 화면에 죽 뜨는 책표지들을 보자, 즐거워졌다. <백설의 공포> <초인부대> <시간초특급> <동위원소인간> 등 지금도 기억에 선연한 제목의 SF소설들. 초등학교 시절 밤을 새워가며, 아니 하루 종일 읽고 또 읽었던 책이었다. 제목만 들여다봐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몇 장면이 있고 그 압도적인 상상력의 넓이에 경탄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중에는 <지구의 마지막 날> <불사판매주식회사> <비이글호의 모험> <은하계방위군> 등 SF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원작 혹은 모티브가 된 작품들도 있다. 아이디어 회관에서 나온 SF소설들을 읽은 뒤에는 <화성 연대기> <미래세계에서 온 사나이> 등등 동서추리문고에서 몇권 끼워져나온 SF를 읽었다.
과거에 들뜬 마음으로 읽었던 SF소설들을 다시 보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동서추리문고가 절판되고(아마도 망했을 거다), 그뒤에는 변변한 SF문고 혹은 전집이 나온 적이 거의 없다. 시공사에서 그리폰북스라는 이름으로 SF의 걸작들을 줄지어 내고 있는 것말고는. 추리소설도 마찬가지다. 애거사 크리스티나 코넌 도일, 엘러리 퀸 정도말고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주 화제가 되는 신작들이나 조금 나온다. 동서추리문고로 나왔던 하드보일드의 고전 <피의 수확>이나 <심판은 내가 한다> 같은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도 방법이 거의 없다. 이른바 대중소설의 ‘명작’들을 한국에서 번역본으로 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독자가 그리 많은 건 아니다. 그리폰북스의 판매량은 권당 기껏해야 2천부. 단순한 ‘이익’을 생각한다면 쉽게 손댈 수 없는 기획이다. 그래서 나도 꼬박꼬박 그리폰북스는 사서 봤다. 소장가치도 있고 사줘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하지만 한번 보고 버릴 대중소설의 국내가격은 너무 비싸다. 문고판도 없고.)
어쨌거나 ‘직지 프로젝트’를 만든 사람들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은 ‘SF마니아’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직지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진정한 마니아는 정보를 독점하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과거 한동안 ‘아트 록’에 빠져 있을 때에도 유럽의 ‘희귀음반’을 라이선스로 내던 ‘시완레코드’의 존재가 정말 반가웠다. 그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타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직접 음반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마니아가 늘어날수록 한 사회의 문화가 깊고 넓어진다. 돈이나 사회적 명예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즐기는 일을 한다. 아마도 그게 진정한 마니아의 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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