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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가
강유원(철학박사) 2004-01-08

직업을 가지면 골치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직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것이 성립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이 골치아픔은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관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이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다면, 그가 그 일에 관한 한 아무리 전문가라 해도, 그 일을 해주면 고맙고 안 해주면 섭섭할 뿐이다. 부탁인 걸 어찌하겠나. 미안하고 민망하고 얼굴봐서 해주는 거지 반드시 해줘야 한다는 법도 없고 그러길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이에게 무슨 일을 해달라고 ‘정식으로’ 말하고 어떤 이도 그것에 응했다면, 우리와 어떤 이 사이에는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너무 빤한 일이다. 어떤 이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바탕으로, 그 능력을 일정 기간 수행하는 대가로 어떤 이는 보상을 받는 계약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일단 계약 관계에 들어서면 어떤 이나 우리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 두 사람은 계약서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서로 흉허물없는 사이여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해도 계약서를 앞에 두면 서로 냉담한 계약 당사자에 지나지 않는다.

계약을 맺은 두 당사자의 사이가 어그러지는 건, 어떤 이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잘못됐든지 아니면 어떤 이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든지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일보다는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의 이런저런 사정이 두 당사자 사이에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터져버린다. 관계가 문제이지 능력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말로는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하면서도 일처리는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대개 일을 그르치는 장본인들이다. 계약은 지극히 합리적인, 그것도 타산적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일인데 그것에 임하는 사람들이 그 수준을 못 맞추는 것이다.

어찌어찌 흐르다 보니 팔 수 없는 게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식도 팔 수 있는 물건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그러한 거래 행위를 위해 법률가들은 ‘지적소유권에 관한 법률’ 따위를 만들어주었다. 지식을 가진 이는 일종의 지식자본가가 되었으며, 법률가들의 보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위에 자신의 삶의 기둥을 세우는 이를 ‘직업적 문필가’라 하겠다. 계약없이 그냥 글을 쓰는 이도 있겠지만, 지금 세상에서 그런 이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므로 문필가라 하면 그 앞에 ‘직업적’이라는 형용어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지식, 그리고 그것의 표현형태인 글이 상품이라는 것이 직업적 문필가의 입각점이라면, 시장의 규칙, 즉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 것이 그의 최소한의 본분일 것이다. 이 본분을 지키기 싫으면 돈 안 받고 글쓰는 ‘그냥’ 문필가이든지 아니면 시장에 아예 들어오지 말든지 해야 한다. 수많은 직업적 문필가들은 이러한 본분을 충실히 지키고 스스로를 지식자본가라 자각하고 법률가의 서비스를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 문필가들은 지식인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냥 글을 판다는 것에 충실할 뿐 그들이 딱히 세상을 어찌 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지 않는 한, 그들은 틀림없이 직업적 문필가일 뿐이다. 이들에게서는 별다른 문제가 생겨나지 않는다. 문제는 어디로 보나 직업적 문필가임에 틀림없는데, 어디로 보나 ‘지적소유권’에 자신의 생존을 매달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소유권 종식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생겨난다. 시장의 규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그러한 위반을 지식인의 특권인 양 과시하면서, 지식인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별볼일 없는 종자일 뿐인 그들은 끊임없이 훈계를 해댄다. 짜증스럽다. 지식인 아니면 어때.

우리 모두가 느긋하게 살아가는 단순한 사회가 되면 문필가 따위는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문필가는 모터쇼에서 자동차 옆에 서 있는 사람들보다 쓸모없는지도 모른다. 지적소유권으로 생존을 영위하는 일, 하찮다.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