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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무이! - 매염방 (1963~2003)
박혜명 2004-01-07

“레슬리(장국영)의 자살에 이어 무이(매염방)까지 잃었다. 올해는 홍콩 연예계에 불행한 한해였다.” 성룡은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증지위, 유덕화, 장학우, 정수문, 양가휘, 양자경, 진혜림 등 100여명의 홍콩 연예계 인사들이 지킨 자리에서 배우이자 가수로서 20년 넘게 활동했고 홍콩 연예계의 ‘여왕’으로 군림해온 이가 자궁경부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지난 2003년 12월30일 새벽(현지시각), 서른아홉의 나이로 매염방이 사망했다.

매염방은 1963년 2남2녀의 막내로 홍콩에서 태어났다. 경극배우 출신의 어머니가 가사를 책임지는 어려운 가정에서 그는 어머니가 경극을 가르치는 극단을 쫓아다니며 연기와 노래의 꿈을 품었다. 삶이 보장되지 않는 이 길을 어머니는 반대했지만 매염방은 네살 때부터 재능을 보였고 여섯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래 훈련을 받았다. 1982년 신수가창대회에서 1위에 당선된 것이 커리어의 출발이었다. 강렬한 저음과 화려한 댄스음악으로 내놓은 첫 앨범 <적색 매염방>(1983)은 당시 2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이듬해에는 장국영, 장만옥과 공연한 영화 <연분>으로 홍콩 금상장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타고난 재능을 단번에 인정받게 된 그는 연기자와 가수로서 무섭도록 빠르게 최고 스타의 자리로 올라갔다.

큰 눈과 돋보이는 입매, 가느다란 몸에서도 요부 같은 매력을 숨기지 못하는 매염방의 외모를 혹자는 “그로테스크함과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이미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절망으로 되받는 관금붕의 <인지구>와 과거와 현재에 반복되는 아픈 사랑을 지켜보는 허안화의 <남인사십>에서 똑같이 흐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일찍 연예계로 뛰어든 어린 딸을 걱정해 심한 통제 속에 가둬두려 했던 어머니와의 끊임없는 마찰은 늘 짐이었다. 일찌감치 학교 생활을 포기한 대가로 얻어진 스타의 자리는 부정적인 가십을 그림자처럼 따라붙게 했다.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매염방은 벌어들인 돈으로 온갖 사치를 누렸고 끊임없는 염문설도 함께 뿌렸다. 가장 오랜 기간 연인으로 지냈던 배우 조문탁과의 관계는 그중에서도 핵이었지만 결국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은 버리기로”했다.

지난해 9월 암 투병 중이라는 숨겨왔던 사실을 밝히고 그렇더라도 활동은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했던 매염방은 암 3기의 상태에서 콘서트를 치러냈다. 요녀, 대여인(大女人), 카멜레온, 아시아의 마돈나 등 수많은 닉네임을 달고 다니면서 46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단 한번도 같지 않은 모습으로 150번의 솔로 콘서트를 해온 열정을 마지막까지도 접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이 뒤덮은 삶의 이면이 늘 그렇듯 매염방은 외로움에 옥죄어 지냈다. “내가 아픈 것을 안 뒤로 친구들은 음식을 만들어주고 더 좋은 병원을 알아보러 다녔다. 누군가한테 관심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다. 더 용감해지고 힘이 난다. 절대로 내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 난 패배자도 아니고 연약하지도 않다.” 이를 증명하듯 매염방은 지인들 앞에서 웃음을 띤 채 눈을 감았다고, 현지 언론이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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