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물결이 대학가를 뒤덮던 1991년 봄, 백양로를 걸어가다 우연히 아주머니 한분을 만났다. 그분이 내게 살포시 건네준 A4용지에는 ‘어학교재 비디오 판매’라는 제목 아래 외국 ‘원판’ 비디오목록이 빽빽이 적혀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추천해준 것이 샤론 스톤이 주연한 <원초적 본능> 원판과 <칼리큘라>라는 제목의 테이프 2개짜리 영화였다.
테이프당 2만원인가 당시로는 비싼 편이었는데, 생각조차 자기검열에 시달리던 시절이라 검열되지 않은 영화를 본다는 야릇한 호기심에 비디오 플레이어도 없으면서 주머니를 탈탈 털어 추천작 모두를 사 자취방 책꽂이에 꽂아놓았었다. 2년인가 지나 그렇게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여가던 <칼리큘라>를 드디어 볼 기회가 생겼는데, 그 사이 <원초적 본능>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버렸고, 물증은 없으나 내 방에 드나들던 후배 녀석들 중 한명이 가져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잔혹한 서사시, <칼리큘라>는 그렇게 내 곁으로 왔다. 처음 그 영화를 보고 숨이 턱 막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이 영화를 생각하면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서글플 수 없다(불행히도 자막이 나오지 않아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영화를 이해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고, 내 멋대로 해석한 부분도 많다). 틴토 브라스와 펜트하우스의 합작품답게 화끈한 하드코어 장면에 현혹되지 않고 이 영화를 보면, 인간 존재가 직면한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소심하고 평범한 소년 칼리큘라는 황제 티베리우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티베리우스를 죽이고 황제가 된다. 영화가 시작될 때 평화로이 누이와 들판을 뛰어다니던 소년은 혹시 다가올지도 모를 죽음 앞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먼저 상대를 죽여버린 것이다. 이 살인이 원죄가 되어 칼리큘라는 늘 배신의 악몽에서 측근들을 죽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유효한지를 늘 확인한다.
티베리우스의 향연이 성기를 잘라 개에게 던져주거나 물을 강제로 먹인 뒤 배를 가르는 등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사디즘적인 권태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칼리큘라의 항연은 자신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욕망을 보여준다. 칼리큘라의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은 동생의 죽음으로 좌절되는데, 그 이후 칼리큘라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한 하드코어 장면들, 특히 집단난교에서 클로즈업되는 난쟁이의 사정장면은 쾌락의 유한함과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예정되었던 종말은 현실이 되고, 영화의 끝에서 칼에 맞아 기어가면서도 자신은 살아 있다고 말하는 칼리큘라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성서말씀이 오버랩되면서, 이 영화는 오래오래 내 가슴속에 남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중시켜주었다.
<감각의 제국>에서 발기가 사그라들지 않도록 밤새 남성성기를 물고 있는 여배우의 측은하면서도 부질없는 집착처럼, 어느 날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다가오게 될 죽음을 느끼게 되면, 문득 지금 정신없이 몰두해서 하고 있는 일들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결국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문제라고 하였던가?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라도 소년은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