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벽에 파란색 공을 날려본 경험이 있는가? 요즈음 내가 맛들이고 있는 라켓볼이라는 운동 이야기이다. 주로 이동시에 슈퍼나 우체국, 은행, 정거장까지 걷는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던 나는 건강에 무심해도 좋다는 자신감을 상실하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집 앞의 구민회관에 덜컥 라켓볼 레슨을 신청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즐거움이 거기에 있었다. 높은 천장과 삼면의 하얀 벽과 하나의 유리 면으로 둘러친 라켓볼장은 그대로 작은 세계였다. 주먹만한 파란색 공을 라켓으로 휘둘러 팡! 하는 굉음과 작고 파란 것이 흰 벽에 냅다 꽂히는 색감을 즐기고 있노라면 시심을 끌어다 푸른 하늘에 박는다는 어느 중국 시인의 말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공 하나 하나에 내 근심과 걱정거리와 사소한 스트레스를 담아 던져버리고 나면 세상은 어느 새 살 만한 곳이 되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시작한 라켓볼 동기가 한달여를 다니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우연히 회관 복도에서 마주쳤기에 왜 그만두었느냐고 물었더니 한달이나 넘게 레슨을 받아도 살이 빠지지 않아서 헬스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순진한 감각을 고마워해야 할지 부끄러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저 흰 벽면과 파란공과 시심을 움켜잡고 세상을 낙관하던 나는 그제야 라켓볼장 옆의 헬스장을 오가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모두들 짝 달라붙은 화려한 에어로빅 복장에 번쩍이는 스타킹을 신고 제발 보아달라고 온몸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이효리의 살집없는 허리와 권상우의 균형잡힌 근육질의 상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마다할 수 없지 않겠는가? 나도 ‘이건 다 내거’라고 자랑하지 않아도 되는 훌륭한 허리를 가지고 싶다. 그런데 아름다운 표준에 대한 동경은 추구와 집착을 넘어서서 이제는 아예 무시무시한 전쟁의 단계에 들어서버렸다. ‘비만’이라고 자아가 인정하고 객관적인 판정을 받은 구민들은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받아서 드넓은 운동장에 까맣게 모여 대형의 저울에 올라선다. 그들의 적은 바로 살이었다. 수십톤의 살에 대해 과감히 선전포고를 하고는 전투에 돌입한다. 각개 전투요원은 주로 집중적으로 허리를 중심으로 한 뱃살을 공략하여 맡은 바 할당량의 살을 어떻게든 떨어내버려야 하고 그것을 완수한 이들에게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승리한 기쁨이 선사된다. 제 몸의 살을 이겨낸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지…. 진정한 승자는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건강하고 질이 높은 삶을 위한 노력은 거기에서 그칠 수 없다. 육체 밖에서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섭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건강에 좋은 음식은 과연 무엇인지를 그리고 왜 좋은지를 전문가들은 열심히 설명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난 슈퍼에서 평소보다 두어배나 비싸진 브로콜리를 사야 했다. 팔팔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 꺼낸 그놈은 물기 먹은 선도 높은 청록을 내게 보여주었고 선홍의 초고추장에 찍혀서 입 안에서 아삭거리며 씹힐 때면 혀 가득히 오묘한 맛을 선사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브로콜리는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온갖 질병의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여준다는 소개가 나간 이후 난 브로콜리가 무서워졌다. 내가 사서 삶아서 내 입 안으로 집어넣는 그 물건이 나의 생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끔찍한 진리는 그것이 없으면 난 언젠가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어나갈 것만 같은 결론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포는 잠깐, 희한한 자신감으로 가슴이 벅차온다. 전투욕으로 가득 찬 안팎의 세상에 우리는 영원히 당당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기다린다. 언젠가 건강과 다이어트에 대한 전문가들이 냉장고 뒤에서, 싱크대 밑에서 꼬물거리는 까만 놈에 대해서도 무서운 질병을 치료하는 약재가 된다고 소개해주는 날을!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단백질과 칼슘의 보고일 것만 같은 그놈을 ‘비타민’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숙적을 처단하고 동시에 건강한 신체까지 보장할 수 있는 것을 두고 전문용어로는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한다. 인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억년의 역사와 생존력을 자랑하는, 그래서 끊임없는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어 컴배트가 싱크대 곳곳을 장식하도록 만든 그놈들이 바싹 말려져서 곱게 빻아지고 회색빛이 도는 검은 가루가 되어 우리 입 안에 털어넣어지는 그날까지 나는 열심히 기다릴 것이다. 몸에 좋다면 같이 생존하는 어떤 생물이든 희귀종을 만들고 심지어 멸종을 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