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아기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저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책임져야 할 생명을 덜렁 세상에 내놓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 같은 놈을 세상에 또 하나 토해놓는 게 세상을 위해서도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불쌍한 세상이 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하지만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보채는 아내의 성화 덕에 결국 애를 갖게 되었다. 겁나게 먹어치우고, 먹은 만큼 겁나게 싸대면서 녀석은 무럭무럭 자라 지금 네돌을 바라본다.
아이를 낳고 1년쯤 지났을 때 아내는 애를 뚝 떼놓고 저 혼자 독일로 떠났다. 그동안 아이는 집에서 아빠와 할머니한테 한국말을 들으며 자라야 했다. 자리를 잡은 아내가 6개월 만에 돌아와 애를 데리고 돌아갔다. 기억 속에 저장했던 한국말을 고스란히 지우고 아이는 그 자리에 엄마에게 듣는 일본말을 다시 입력해야 했다. 모국어(母國語)는 일본어, 부국어(父國語)는 한국어, 유치원에서는 독일어. 얼마나 혼란스러웠겠는가?
남의 속도 모르고 “3개 국어를 할 테니 얼마나 좋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가 말을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서들 하는 얘기다. 언어가 혼란스러우니 아이의 발달이 늦어질 수밖에. 그래서 엄청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이번 여름 방학에 들어온 아이는 서툴게나마 일본어를 했다. 유카타 차림에 조리를 신고 방안을 이리저리 딸깍딸깍 걸어다니다가 “파파, 나니 시테루노?”(아빠, 뭐해?) 미니 쪽발이 아스토 쿤(君), 무지 귀엽다.
3개 국어가 난무하는 세상이 아이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못지않게 황당하지 않았을까? 아니, ‘이상함’의 기준도 모르는 채 그런 상황에 들어갔으니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 사람들을 접하며 여러 언어를 배워야 했던 루소는, 사람들은 원래 저마다 자기 언어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한다. 하긴, 만나는 사람마다 언어가 달라지니….
요즘은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래, 이 미친놈들아, 애를 잡아라, 잡아. 우리 애가 돌아오면 영어 가르치는 유치원에는 절대로 안 보낼 거다. 아니, 못 보낸다. 근데 문제는 영어 안 가르치는 유치원을 과연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듣자하니 요즘은 다들 경쟁적으로 영어를 가르친단다. 대체 왜들 이 난리일까? 하여튼 대한민국, 정말 이상한 나라다.
걱정되는 것은 바벨의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혼란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테니까. 문제는 우리 아이가 돌아와 살 대한민국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라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승용차로 돈 박스를 실어나르고, 트럭으로 배추잎 차떼기를 하고, 다른 편에서는 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농민이 할복을 하고, 서민이 투신을 한다. 도대체 이런 나라에 겁나서 어떻게 애를 남겨두겠는가?
얼마 전에 한 사내가 새총과 화염병으로 중무장한(?) 채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사진을 봤다. 그는 그렇게 삶의 근거지를 파괴하려는 철거반원과 사적 소유의 신성함을 대변하는 경찰들에 맞서 생존권을 지키고 있었다. 농성을 위해 지은 탑 안에는 젖먹이 아기와 함께 8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는 전기를 끊고, 가스를 끊고, 수도까지 끊는다. 그래, 이 미친놈들아, 죽여라 죽여. 이러니 겁나서 어떻게 애를 낳겠는가?
생존권보다 소유권이 더 신성한 나라. 우리 아이가 앞으로 이런 나라에 살아야 한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동료 시민들의 싸가지. 이런 잔혹한 광경을 보고 기껏 “임대아파트 얻어내려는 수작” 어쩌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아이가 앞으로 이런 야수들 틈에 섞여 살아야 한다. 대책없이 애부터 낳은 내 죄가 실로 크다. 하지만 이왕 낳은 거, 어쩌겠는가? 책임져야지. “2% 정당” 어쩌고 하는 비아냥을 들으며 내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