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國家는 민족이 사는 집家이다. ‘국가와 민족’을 해체, 조립하면 ‘국민과 가족’이다. 가족이 모여 민족이 되고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고대사회의 도시국가의 발생과정을 보면 ‘풍요와 고립’이라는 얼핏 상반된 두 가지 환경조건이 있다. 정치경제적으로 능력있는 가장家長이 기둥이 되어 하나의 가정家庭을 이루듯이, 하나의 국가가 건설되는 데에도 역시 정치경제적으로 능력있는 민족의 가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리적 고립이다. 가장의 집안살림 방식이 맘에 안 든다고 가족들이 모두 가출해버린다면 어찌 가족과 가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국민들이 통치자의 권력을 거부하고 다른 지역으로 맘대로 이주할 수 있다면 지금 국가의 시초가 된 고대의 도시국가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족은 국가라는 ‘홈그라운드’에서 보호받고 생존하고 번식한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나면 그 누구도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 고대의 국가라는 커다란 집이었다. 한반도는 풍요롭진 않지만 지리적으로 충분히 고립되었기에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민족국가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극동아시아의 끝자락 반도에 북방오랑캐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으니 좋거나 싫거나 단일민족이요 우리나라 우리집이다.
오늘날 국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24시간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오늘 지리적 고립이란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조의 땅에 붙어먹고 살아야 하는 농경사회가 아닌 이상 경제력도 지리적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다. 개인은 경제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원하는 다른 국가를 선택해서 이민을 갈 수도 있고 귀화를 할 수도 있다. 공부 좀 하고 세상 물정에 눈뜨고 보니 우리집은 구질구질하고 가족들 사는 꼴은 지리멸렬하고 아버지는 고집불통 파쇼이더라. 더구나 알고보니 이 집도 우리집이 아닌지 어떤 부자가 와서 시시때때로 집안살림 이래라저래라 참견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저 옆집의 우아한 양옥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저녁이면 새하얀 냅킨에 스테이크를 썰면서 교양있게 살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이민을 간다. 이제는 국가라는 집은 더이상 고립된 세계가 아니니까 다른 집으로 양자로 들어가든 식모로 들어가든 어쨌든 갈 수 있다. 집이라는 의미의 국가는 다시 붕괴하고 있다. 국가의 기강이 되는 이념의 깃발은 황금이 아닌 이상 더이상 누구도 우러러 받들 여념도 없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국가는 유구한 민족역사를 자랑하는 ‘한 민족이 사는 집으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온갖 이민족들의 생존이권으로 뭉쳐진 ‘합중국’이다. 그리고 제 민족을 고집하는 ‘국가’는 이민족들의 ‘합중국’에 의해 정치경제적으로 고립되면서 파괴되어가고 있다.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http://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