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 이른바 ‘젊은이’ 중에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꽤 많다. 그렇다 해서 그들의 장래가 어두운 건 아니라고 확신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은 2002년 3월에 출간된 <옥중서한> 머리말에 “체제내화”라는 말을 몇번 썼다.
“나는 이런 세태가 고통스럽다. 출렁이는 국가주의의 물결, 탈정치화의 거대한 에너지, 그리고 군사독재와 맞섰던 항쟁의 대대적인 체제내화에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대규모로 진행되는 저항운동의 체제내화다.”
“참다운 래디컬은 체제내화되지 않는다.”
이런 말 하는 게 엉뚱해 보이는 세상이긴 하지만, 일단 이 텍스트들을 좀 분석해보기로 하자. 여기서 그가 말하는 “체제내화”는 운동가의 입장에서 보아 운동의 전선이 불투명해지고, 그에 따라 운동에서 제기되었던 이슈들이 국가에서 제시하는 법적 합리적 절차에 따라 해결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상황일 것이며, 무엇보다도 운동가의 대규모 전선 이탈 또는 투항, 타협- 통틀어 ‘변절’이라 할 수도 있겠다- 등을 의미할 것이다.
체제내화라는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제내화되지 않는 것, 즉 참다운 래디컬이 무엇인지를 해명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참다운 래디컬은 어찌 보면 근본주의자이고, 속된 말로는 ‘꼴통’이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생각에 가득 찬 확신범이고, 게다가 그 확신이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환상까지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참다운 래디컬은 그 원칙에 벗어난 사안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든지 타협하지 않는다. 2003년에 출간된 <서준식의 생각> 머리말에는 그러한 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주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원리가 관철되어 있으며, 글로써 사회가 변할 만큼 이 사회는 아직 신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히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발딛고 있는 땅의 본질적 구조를 알지 못한 채, 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한 채, 그 현실을 유지 보수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수용하여, 그것에 호응하는 것이 체제내화라면, 참다운 래디컬은, ‘래디컬’이라는 말의 뜻 그대로 ‘철저하게’ 자신의 현실 인식과 그것의 실천 방법론을 고집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다운 래디컬의 가장 큰 적은 걸핏하면 체제내화되고 싶은, 또는 자신도 모르게 체제내화되고 마는, 그리하여 그것도 모른 채 자신이 여전히 래디컬이라고 착각하는 마음과 행위일 것이며, 그 다음의 적은 체제의 유지 보수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거나, 체제내화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사람들일 터인데, 바로 그 선두에 법률가들이 있다.
법률가, 특히 자본가들의 사업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그에 이어 자본가가 다양한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부에서도 체제방어 논리 개발에 기여해온 근대 이후의 법률가는 자신이 아무리 래디컬이라 주장해도, 또는 속칭 ‘인권 변호사’라 해도, 또는 속칭 ‘민주 변호사’라 해도, 또는 속칭 ‘양심적 판사’라 해도 그 태생에는 체제내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법률을 익혀서, 자신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국가 기구의 승인을 받아서 법률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참다운 래디컬 서준식이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 확신범으로서 국가기구에 맞설 때 국가기구를 대신하여 그를 직접 대면했던 이들은 여러 행태의 법률가들이었다. 그는 법률가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인권위원회? 기대하지 말아요. 환상만 심어주고 결국 당신들을 배신할걸….”
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