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크리스마스다. 노엘이 울려퍼지고, 1년 만에 돌아온 소년은 또다시 북채를 잡는다. 라 팜팜팜팜. 별들은 내려와- 점멸하는 쇼윈도의 장식등이 되거나, 혹은 광장과, 상가와, 교회와, 집과, 백화점의 중앙분수대 근처에 선 크리스마스 트리의 잔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다. 스모그의 대기를 뚫고서, 별들은 어떻게 이 땅을 찾았을까? 스모그의 대기를 뚫고서, 라, 팜팜팜팜.
힘들었던 한해가 저물어간다. 그래서 고요하고, 거룩한 이 시즌의 밤이 되면- 문득, 모든 걸 용서하고픈 마음이다. 아마도 그래서, 고요하고 거룩한, 밤인 거겠지. 전철역 근처의 가판대에서, 아이에게 줄 장난감을 고르며 나는 생각한다. 라 팜팜팜팜. 1.5볼트의 건전지를 동력으로, 갈색의 곰 인형이 열심히 북을 친다. 흐리게, 그 무대를 비추고 선 꼬마전구의 필라멘트가, 문득 바람에 흔들린다. 1.5볼트만큼의 동력으로, 구경꾼 서넛이 인형을 집어든다. 딱, 만원입니다. 딱, 만원을 내고, 나 역시 인형을 집어든다. 삶에는, 더이상의 전압이 들어오지 않는다. 꼬마전구 속의 필라멘트가, 또 한번 바람에 흔들린다.
인형을 안고 오른 좌석버스 속에는, 저마다- 인형 같은 걸 안고 탄 듯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군요. 저에겐 가족이 있습니다. 지금 가족의 곁으로, 저는 가고 있습니다. 캐럴 대신, 정당 대표의 150억 수수설과, 특검을 둘러싼 정당간의 공방이 라디오에선 나오지만- 우리는 대체로, 무덤덤하다. 인형, 같다. 반짝. 필라멘트와 같은 어떤 것이- 잠깐, 가슴속에서 흐린 빛을 발하는 듯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덤덤, 하다. 마치 무덤, 같다. 버스 속은- 결국 자신의 인(燐)을 소등하는 서너 마리의 반딧불들로, 더욱 어두워진다. 고요하다. 고요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엔 우리는 너무 지쳐 있다. 서로의 집까지는, 아직도 여러 정거장이 남아 있다.
차례차례, 우리는 버스에서 내린다. 정해진 정거장을 지나치지 않고, 버스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남극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고, 굴뚝이 없는 집으로, 우리는 돌아온다. 문득, 눈물겹다. 아빠, 아빠가 바로 산타클로스란 걸 알고 있었어요. 저 굴뚝으로 도대체, 어떻게 들어오신 건가요? 얘야, 아빠는 산타가 아니란다. 그런 편견을 버리렴. 아빠는 사실, 통아저씨란다. 나는 곰 인형보다, 바이오니클이 더 좋은데라고 말하는 아이를- 나는 꼭 껴안아준다. 미안하다 얘야. 세상은 길고, 좁고, 어두운 통로였단다. 좀더 유연하고, 소박하고, 초라하지 않았으면, 아빠는 저 굴뚝을 통과하지 못했을 거야. 기다리렴. 그곳엔 먼지가 많았단다. 아빠는 지금 손을 씻어야 해. 먼지를 너무 마시고, 먼지를, 너무 만졌어.
그럭저럭, 아이는 곰 인형을 용서한다. 아니, 아빠를 용서한다. 라, 팜팜팜팜. 마치 북을 두드리듯 샤워기의 물줄기가 내 몸을 두드린다. 나는 좀더, 유연하고, 소박하고, 초라해진다. 거울 속에는- 당장이라도, 어떤 통 속에든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아저씨가, 자신의 전신에 비누를 칠하고 있다. 비누는 미끌미끌, 할수록 좋다. 여보, 당신 요즘 여윈 것 같아요. 아내의 물음에, 나는 대꾸를 마다한다. 9시 뉴스가, 다시 150억 수수설과 정치권의 파장을, 집중 보도한다. 세상이 자꾸, 좁아져서 그래. 대꾸를 마다한 내 마음이, 어두운 통 속 같은 마음속에서- 집중 대꾸를, 한다. 집중할수록, 세상은 견딜 수 없다. 아주 잠깐, 1.5볼트 이상의 전압이 온몸을 관통한다. 하마터면, 필라멘트가 탈 뻔했잖아. 조심하기로, 나는 마음먹는다.
아이를 안고, 나는 잠이 든다. 잠결에, 지붕 위를 지나치는 산타의 썰매 소리를, 듣는다. 산타는 결코, 우리의 굴뚝을 드나들지 않는다. 나는 문득, 산타를 잡아죽이고 싶었지만- 아니 그전에, 나는 잠을 좀 자두어야 한다. 무척 힘든 하루였고, 무척 힘든 한해였다. 고요하고 거룩한 이 밤은 악몽(樂夢)인가, 악몽(惡夢)인가? 어둠에 묻힌 밤 속에서, 나는 아이를 끌어안는다. 아이의 몸이 왠지 미끌미끌, 한 느낌이다. 어디선가, 비누냄새가 난다.
박민규/ 무규칙이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