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하다. 민주당과 우리당이 싸운다. 거기에 보수 야당과 보수 신문이 뛰어든다.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함께 정부를 압박하고, 조선일보가 민주당을 도와 우리당을 공격한다. 고립된 정부와 소수 여당을 상대로 한나라당-조선일보-민주당이 삼각편대를 이루어 이렇게 긴밀히 협력한다. 누가 그랬더라? 민주당은 자칭 호남의 정서를 대변하는 당,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는 반(反)호남의 선봉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코미디는 조순형 대표가 전직 대통령들을 알현하는 데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듣자 하니 그 자리에서 대통령 험담을 했단다. 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전직 대통령에게 두루 문안 올림으로써 호남(김대중)-부산·경남(김영삼)-대구·경북(전두환, 노태우)을 잇는 포위망을 구축하겠다는 걸까? 열린당을 “호남의 배신자”로 몰아붙이는 당의 대표가 취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광주시민을 학살한 원흉들을 찾아가 덕담을 듣는 것. 이 정도면 가히 초현실주의 부조리극이 아닌가.
코미디에 김영삼씨가 빠질 리 없다. 그가 단식농성을 하는 최병렬 대표를 찾았다. “나도 23일간 단식을 해보았지만, 굶으면 죽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의 영삼 거사, 23일간 단식 수도 끝에 득(得)한 도(道)가 “굶으면 죽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23일간 생체실험을 하기 전까지는 밥을 굶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실험으로 밥을 굶어도 적어도 23일간은 죽지 않는다는 게 드러났으니, 최 대표는 앞으로 보름은 더 안심하고 굶으셔도 된다.
‘반노’(反盧)의 기치 아래 영호남의 지역적 화합이 이루어지고, 전직 대통령들 사이에 인간적 화해가 이루어졌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특검제’니 뭐니, 저게 다 밥그릇 싸움이다. 단식하는 최 대표의 등 뒤에 나부끼는 현수막. “나라를 구하겠습니다.” 그들의 밥그릇은 이 참에 아예 ‘나라’가 된다. 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농민이 할복을 하고, 신용불량자들이 자식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시점에, 저들은 국회에 모여 기껏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자기들 밥그릇 챙기느라 밥까지 굶는다.
민주당과 우리당의 갈등도 당내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밥그릇 싸움일 게다. 이 한심한 싸움에서 그래도 걸질 게 있다면, 이 몹쓸 싸움이 지역감정을 이용해 유권자를 동원하는 낡은 지배방식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리라. 한나라당이야 오래전부터 지역감정 조장의 원흉이었고, 민주당 역시 실은 오래전부터 호남의 지역주의를 요긴하게 써먹어왔다. 이 낡은 지배방식에 우리당이 이의를 제기했고, 여기에 밥그릇을 위협받은 호남 지역주의와 영남의 지역주의가 일시적으로 어색한 공조에 들어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우리당과 민주당의 갈등. 이는 영남 지역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에서의 이견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남은 가해자였으므로 먼저 지역감정을 풀 윤리적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다수이므로 그것을 풀 정치적 이유가 없다. 반면 호남은 피해자였으므로 먼저 지역감정을 풀 윤리적 의무는 없다. 반면 정치적 소수자이므로 그것을 먼저 풀 정치적 이유가 있다. 이렇게 지역감정의 윤리와 정치는 묘하게 교차한다.
하지만 이 두개의 판단은 논리적으로 서로 배척하는 게 아니다. 가령 우리당에서 “호남부터 풀자”고 주장한다고 ‘지역감정의 무장을 해제할 윤리적 의무가 영남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닐 게다. 다만 그것을 풀려면 호남이 먼저 무장해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전술적 판단일 뿐. 하지만 우리당의 이런 ‘정치적’ 판단에 민주당은 “호남은 피해자인데 왜 먼저 풀어야 하느냐”며 윤리적 판단을 들이밀며, 그들을 ‘호남의 배신자’로 몰아붙인다. 여기에는 모종의 논리적 오류가 있다.
논리적 오류라고 정서적 효과를 못 내겠는가?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타도어가 외려 강렬한 정치적 효과를 내는 법. 사실 호남의 지역주의가 이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행복하게 합류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호남 정권의 실정과 부패를 시민들이 목도한 이상, 이제 그것은 기껏해야 호남지역과 호남 출신 서울 엘리트들의 기득권 동원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제 호남도 자신을 얽어맨 낡은 지역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