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린다>MBC 수·목 밤 9시55분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반도에 꽃미남 열풍이 불던 때가 있었다. 2001년 무렵이었다. 뽀얀 피부, 곱상한 생김새, 고분고분한 성격. 여자친구 말을 호환 마마보다 무서워할 것 같은 이미지의 꽃미남이 대중매체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꽃미남 열풍이 각종 잡지의 표지를 장식던 시절이 있었다. 꽃미남은 여성 상위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마초들의 시대가 거한 듯했다. 그러나 꽃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지금 텔레비전에는 남자들의 땀냄새가 물씬하다.
MBC <나는 달린다>의 무철(김강우)의 직업은 용접공이다. 그러나 무철은 단순무식한 공돌이가 아니다. 일단 그는 ‘외로워도 슬퍼도’ 달린다. 용접봉을 들고 불꽃을 튀기며 일하는 모습에서도 땀냄새가 물씬하다. 게다가 그의 방은 손때 묻은 책들로 빼곡하다. 지식인 남성의 좀스러움과 노동계급 남성의 우악스러움에 지친 먹물 여성들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조건이다. 노동계급의 근육질에 중산층의 지성을 갖췄다니 웬만해서는 거부하기 힘들다. <나는 달린다>를 보면 무철의 매력에 빠져 나도 달리고 싶어진다.
무철은 또 책임지는 가부장이자 묵묵한 남자친구이며 속깊은 아들, 손자다. 고아인 무철은 동생에게 유사 가부장이다. 무철이 청계천 헌 책방을 처음으로 찾게 된 것도 동생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전과자 동생이 끊임없이 사고를 쳐도 언제나 형은 동생을 믿고 보듬는다. 어떤 경우에도 화내지 않는 ‘책임지는’ 가부장 이미지다. 사진기자인 여자친구 희야(채정안)에게는 그저 말없이 지켜봐주는 묵묵한 남자친구다. 오는 사람 막지도, 가는 사람 잡지도 않는다. 그뿐인가.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동네 구멍가게 할머니에게는 다정다감한 손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다 망해가는 공장 사장님과는 의리를 버리지 않는, 끝까지 믿고 따르는 유사 부자관계를 맺는다.
이 드라마는 우리 시대 연애 판타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80년대의 속물적인 판타지 중 하나는 남자 대학생과 여공의 연애담이었다. 물론 욕망의 주체는 남성이었다. <나는 달린다>는 남녀의 신분을 뒤집는다. 대학을 갓 졸업한 여기자와 용접공의 연애담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남성의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의 것에 가깝다.
평범한 듯 비범한 김강우의 외모는 무철의 캐릭터에 썩 잘 어울린다. 짙은 눈썹과 파릇한 구레나룻에서는 강인함이, 유난히 붉은 입술과 깊은 눈빛에서는 유약함이 드러난다. 적당히 저음의 목소리는 화룡점정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시청률은 바닥을 치지만, 연기자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김강우는 가장 데이트 하고 싶은 연예인 1위로 꼽히기도 하고, 그의 팬카페 회원 수는 1만명을 훌쩍 넘겼다. 이 드라마의 흥행 실패에도 불구하고 용접공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드라마까지 등장한다니 당분간 드라마에서 ‘땀냄새’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2002년 여름, 대∼한민국과 함께 김남일 열풍이 반도 남단을 강타했다. 근육질의 남성이 꽃미남을 꺾은 것도 이즈음이다. 축구선수 김남일은 물론 근육질이다. 김남일은 또 경기 도중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면서도 “경기 끝나고 나 빼고 나이트 가면 안 돼”를 외치는 귀여운 마초의 이미지를 가졌다. 자기팀 동료에게 부상을 입힌 선수에게 과격한 태클로 복수를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 귀여운 마초에게 한국 여성들은 “남일아 불 꺼라”라는 화끈한 농담으로 응답했다.
이 무렵 ‘근육’으로 승부하는 가수들도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전의 꽃미남들이 너도나도 근육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신화가 근육을 키우고 나와 인기를 끈 것도 이즈음이다. 심지어 ‘평범함’으로 승부하는 국민가수 god조차 근육질로 무장하고 나왔다. 플라이투더 스카이, 비 등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적당한 근육은 가수에게도 기본이 됐다. 근육질의 꽃미남의 등장에는 좀더 솔직해진 여성의 욕망이 투사돼 있다.
데뷔 초기에 몸매로 승부하는 배우들이 잇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권상우가 그 대표선수다. 권상우의 벗은 웃통이 없었다면, 권상우의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 권상우뿐 아니라 이제 웬만한 배우들에게 단단한 몸매는 연기의 한 조건이 됐다.
땀냄새는 브라운관 안팎에서 풍긴다. 취향의 마초이제이션은 ‘추리닝 패션’의 유행으로 드러났다. 추리닝 패션이 뜨면서 아디다스가 떴고, 푸마가 인기를 끌었다. 아디다스와 푸마의 이미지는 나이키에 비해 훨씬 더 독한 땀냄새를 풍긴다. 거리를 뒤덮은 검은색 푸마 티셔츠와 빨간색 런닝화는 21세 초반 한국사회의 중요한 코드가 됐다. 이렇게 후끈한 땀냄새 속에 한국사회의 마초이제이션은 조금씩조금씩 진행되고 있다.신윤동욱/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