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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강유원(철학박사) 2003-12-09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 유토피아론의 원조격이라 할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 나오는 정치가는 재산이 없다. 재산은커녕 처자식도 공유해야 할 판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 끊을 게 없어서 재산을 끊고 처자식을 끊나. 그게 순 독재지 어디 유토피아냐 싶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 물정 모르는 철학자의 철없는 발상이라고 간주하고 개무시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에 등장하는 여러 유토피아론들도 한결같이 사유재산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이게 그냥 개무시할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도대체 왜들 이렇게 사유재산 폐지를 주장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그냥 놔두고 플라톤이 그랬던 이유만이라도 알아보자. 플라톤이 살아간 시대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절정을 지나고 혼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토지가 척박해져서 식량을 자급할 수도 없었고, 해외로 진출하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어려웠다. 그전부터 그리스 사람들은 해외에 진출하여 식민지를 많이 건설하기는 했으나 이때의 진출에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땅덩어리에서는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사람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굳이 몸을 움직여서 뭔가를 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면 없는 대로 나누고 돕고 살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자들이 더 악착같이 챙기고 모으려 드는 것 역시 세상의 오랜 이치다. 따라서 이런 때일수록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게 마련이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가 꼭 그랬다. 그래서 그는 돈에 의해 정치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 보고 정치가들의 사유재산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가정도 꾸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예 재산을 만들려는 욕구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플라톤의 유토피아론을 보고 철없는 철학자라고 비웃는 것도 좋지만 이른바 정치의 부정부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뚜렷하게 알려주는 진단이라고 여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그러면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에는 정치가 엉망이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후세에 나온 유토피아론들은 도대체 왜 사유재산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걸까? 이거 재산하고 원수진 사람들도 아니고, 아니면 플라톤의 주장을 베낀 것도 아니고, 왜 본능에 가까운 재산의 욕구를 제한하고 있는 걸까? 이에 대답하려면 재산이 무엇인지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혼자 뭘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게 재산이 되는 게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어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이 땅 내 것’ 한다고 해서 재산이 되는 게 아니라 남들이 ‘으응… 그거 네 것’ 해줘야 재산이 된다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한두 사람이 말로만 인정해준다고 해서 재산이 되는 게 아니고 아예 법으로 인정받아야 재산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돈 중심, 재산 중심의 세상에서는 재산에 관한 법이 가장 기본적인 법이 된다. 다른 법들은 다 거기서 이끌어져 나온다.

재산은 오로지 재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돈 중심의 사회에서는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힘이 세진다. 돈 많으면 세상살이가 훨씬 편한 것도 이런 이치에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돈 중심의 세상에서 재산은 사회적인 권력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사실 조선시대처럼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를 정하는 기준이 돈이 아니라면 이게 권력으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재산이 사회적 권력으로 변환되는 게 굉장히 쉽다.

그냥 보통 사람이 돈 많으면 자기 돈 자기가 쓰고 사니까 좀 아니꼽기는 해도 딱히 뭐라 할 건 없지만 정치가가 돈 많으면 그 돈 가지고 헛짓 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가는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마땅한 사람인데 돈독 오르면 뭐가 되겠나. 그러니 자기 돈이 많건 남의 돈을 가져다 쓰건 정치가들은 돈과 아예 인연을 끊게 하는 건 어떨까? 특별입법이라도 해야 한다. 플라톤처럼 처자식까지 끊게 할 수는 없고, 돈이라도 끊게 해야지.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