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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도 한철
이다혜 2003-11-20

어릴 때 본 영화의 한 장면에서 처음 그것을 보았다. 초원의 맑은 하늘 위에 갑자기 몰려든 검은 비구름.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리고 곧 그것은 하늘을 덮고, 태양을 가리고, 익어 고개를 숙인- 드넓은 논의 이삭들 위로 작은 폭탄처럼 쏟아져내렸다. 저게 뭐예요? 저것은, 메뚜기란다. 대수롭잖게 아버지가 얘기했지만, 메뚜기, 하면 ‘폴짝폴짝’을 떠올리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것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메뚜기라니.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가? 종말인가? 어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는데, 아아, 아버지… 지금 팝콘을 먹을 때가 아니잖아요!

결국 나는 메뚜기를 두려워하는 이상한 소년이 되었다. 뭐? 뱀보다 메뚜기가 더 무섭다고? 으응,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김밥을 먹으며 친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김밥을 먹으며, 나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가을 소풍장소의 메뚜기들을 경계하고는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메뚜기떼의 습격이 있은 그 영화의 제목은 끝끝내 기억나지 않고, 나는 지금도… 뭐랄까 아직도 영 메뚜기가 내키지 않고, 때로 개그맨 유재석이 무섭게 느껴지는- 그런 이상한 인간이 되었다. 팝콘을 드시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문득 그래서 이 세상에 메뚜기떼와 나만이 남았다는 아스라한 당혹감. 아아. 이것 참 외롭고도 난감한걸? 한줌의 팝콘을 집어먹으며, 나는 영 기분이 언짢았다.

검은 메뚜기가, 실은 푸른 메뚜기의 알에서 부화된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어떤 역사서적을 통해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였는데, 당시의 전쟁은 식량에 의해 승패가 가늠되었고, 검은 메뚜기는 상대국의 식량을 축내는 일종의 생물병기였다고 한다. 즉 자연의 종(種)이 아닌, 인위적 변종이란 얘기. 뭐야? 유전공학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라고 여겼지만,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우선 들판 여기저기에 분포된 푸른 메뚜기의 알을 채집한다. 그리고 그 알들을, 이를테면 꽉 짜인 박스 같은 곳에 촘촘하게 배열한다. 그러니까 부화(孵化)의 경쟁률을 고도로 높여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검은 색의 변종이 탄생한다는 얘기였다. 겨우 그것 때문에? 겨우 그것 때문에! 문득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부웅 붕’의 날개소리와, 촘촘하고, 비좁고 비좁게 느껴지던 어떤 박스의 기억. 즉, 나라고 하는 이상한 인간의, 어둡고 어두웠던 부화의 기억.

수능이 끝났다. 수능이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나도 모르게 휴, 한숨을 돌리는 기분이다. 마치 유재석처럼? 마치 유재석처럼! 돌이켜보면, 수능이 끝났던 그해의 겨울이야말로- 내가 인생에서 가장 즐겁게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폴짝폴짝 친구들을 만났던- 푸르고 푸른, 초원의 시기였다. 글로 써놓고 보니, 마치 한 마리의 푸른 메뚜기가 된 듯한 기분이고, 그 겨울을 끝으로 나는 다시는 그런 시절을 살아갈 수 없었다. 부웅 붕. 다시금 귀를 울리는 서로의 날개소리와, 비좁고 숨막혀 언제나 초조했던 부화의 기억. 왜, 졸업(卒業)을 할 때마다 또 졸(卒)이 되는 거지? 살아야 해. 아아, 닥치는 대로 돈을 벌고 싶어.

모쪼록 그런 이유로, 나는 이 겨울 날개를 다친 검은 메뚜기처럼 극장가를 서성이고 싶다. 수능을 마친 동생들이여. 검어지기 전에, 더 검어지기 전에- 모쪼록 이 겨울에는 톱밥난로처럼 따뜻한 몇편의 영화라도 ‘닥치는 대로’ 감상해두자. 이 겨울이 지나면, 누군가 또다시 그대를 15년간 감금할지니. 어느 날 그대가 나와 같은 올드보이가 되어 있다 해도, 그러니 결코 놀라거나 서러워 마라.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눈물겹지만, 우리는 모두 검은 메뚜기들이고, 더 눈물겹게도, 우리는 모두 푸른 메뚜기였다. 바로 지금이, ‘닥치는 대로’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을 때다. 박민규/무규칙이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