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권 기지에서 행해진 원자력 실험의 결과는 끔찍했다. 빙하가 녹으면서 1억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선사시대 공룡, 레도사우루스가 부활한 것이다. 공룡을 처음 목격한 톰 네즈빗 박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선박과 등대가 부서지고 원인 모를 희생자가 속출하는 사건이 연일 벌어지자, 이 모든 것이 레도사우루스의 짓이라 확신한 톰은 고생물학자 엘슨 박사와 조수 리를 설득하여 공룡과 직접 대면코자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심해에서 온 괴물>은 심하게 썰렁하고 조잡하다. 첨단의 경계를 경쟁하듯 뛰어넘는 지금의 SF ‘디지털’영화 팬들의 눈에는 이 수공업적인 ‘인형극’은 정말로 애들 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다(심지어 공룡 크기는 자꾸 바뀐다. 실제로 사용된 공룡 모형은 단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배경화면과의 싱크로가 제대로 맞지 않은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해에서 온 괴물>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50년대 괴물영화의 시초라는 사실, 그리고 이 영화의 실제적인 주역 ‘두명의 레이’ 때문이다.
1953년작인 <심해에서 온 괴물>은 원자력 실험으로 오프닝을 연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 그리고 빙하가 녹아 무너지며 엄청난 물결이 일렁거린다. 영화 내내 원자력 실험에 대한 후회라든가 반성의 빛은 조금도 없이 진행되지만(반어적인 쓰임이었겠으나, 실험 진행과정을 보면서 과학자들이 흐뭇하게 주고받는 대사는 놀랍다. “실험을 계속하면 지식도 늘어가겠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기분이야.”), 오프닝신의 무시무시한 잔상은 영화를 내내 지배한다. 1945년 핵폭탄의 위력에 처음으로 맞닥뜨린 사람들은, 50년대 내내 핵폭탄으로 인해 전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의식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심해에서 온 괴물>은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존재가 자신의 창조주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관해 공룡의 모습을 빌려 최초로 언급하였고, 그 전제는 이후 쏟아져나온 50년대 괴물영화들의 전통이 되었다. 거대한 개미들, 거미들, 전갈들, 문어들… 자연의 돌연변이들은 결국 인간이 저지른 만행의 산물이며 인간들은 그 괴물들을 영화 속에서 처벌함으로써 이상한 속죄의식을 치르는 셈이었다. 조잡한 싸구려 화면 속에 배어 있는 마조히스틱한 매혹!
이 거대한 공룡은 이후 <신밧드의 일곱 번째 모험> <제이슨과 아라곤호의 선원들> <걸리버의 제3세계> <신밧드의 모험> 등을 통해 스톱모션 애니메이티드 특수효과라는 고유한 기법을 창조해낸 특수효과 테크니션 레이 해리하우젠의 온전한 첫 번째 창조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10대 시절 공룡과 우주, 특수효과 테크니션의 전설적인 존재 윌리스 오브라이언을 숭배했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진 레이 브래드버리(그렇다. <화씨 451> <화성의 죽은 도시>의 그 브래드버리!)의 단편소설을, 브래드버리가 직접 각색하고 해리하우젠이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심해에서 온 괴물>은 두 레이의 진정한 합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플먼트로 수록된 두 사람의 대담은 30년대 싸구려 공상과학영화를 보며 꿈을 키웠던 모험가들의 흐뭇한 입담으로 채워지는 즐거운 회고록이다. 1932년 시카고세계박람회에 전시된 공룡 모형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해 결국 안내원에게 쫓겨나고 말았던 두 소년이 자신들만의 판타지 영토를 기어이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심해에서 온 괴물>을 의 무척 ‘낙관적인’ 버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김용언 mayham@empal.com
Beast from 20,000 Fathoms 1953년감독 유진 로리출연 폴 크리스티언, 폴라 레이몬드, 세실 캘러웨이장르 SF | DVD 화면포맷 1.33:1오디오 돌비디지털 1.0 | 출시사 워너브러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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