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꽃을 피우던 시기이기도 하다. 암울한 미래를 그리는 영화들은 어디서 그 단서를 얻었을까. 오히려 그것은 당시의 현실이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산업사회의 ‘피곤도’는 극에 달했고 그 결과 산업사회 이후에 올 다음 패러다임이라면 그 피곤도의 증가 이외에 다름이 아닐 것이라는 자각이 이런 영화들을 낳는다. 그러면서도 이런 상상력의 배경에는 ‘기술은 계속 진보할 것이다’라는 가정도 들어 있다. 그러니 이 디스토피아적 가정법은 ‘연장선’ 속에서 미래를 기술하는 한 방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그리고 테리 길리엄의 <여인의 음모>(원제 ‘브라질’)가 바로 그런 상상력의 대표자격들인 영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시기가 바로 뉴에이지의 발흥 시기와 겹친다는 것. 디스토피아, 뉴에이지, 그 두 갈래는 방향은 달라도 동일한 당대적 조건에서 탄생한 쌍둥이들이다.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은 그 제목의 탄생부터가 음악적이고 현실과 대위법적이다. 그가 <브라질>이라는 제목을 얻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테리 길리엄이 영국의 어느 철강 도시에 머물렀을 때, 온통 철갑을 두른 듯 회색인 그 항구도시의 음울함 속에서 석양이 지는데 브라질풍의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는 한 남자를 해변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 대비, 즉 문명의 회색빛 암울함과 라틴풍의 밝음 사이의 대조 속에서 테리 길리엄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꽃을 피운다.
과연 영화음악은 그 대조를 기조로 움직이고 있다. 사운드트랙을 맡은 마이클 카맨은 뉴욕에서 태어난 저명한 영화음악가이다. 줄리아드를 나온 음악 엘리트인 그는 처음부터 삐딱선을 탔다. 그는 클래식 공부를 하면서도 ‘뉴욕 로큰롤 앙상블’을 결성하여 특유의 퓨전 음악을 시도했다. 또한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감독(라이브) 노릇을 하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브라이언 애덤스를 상대하기도 한 팝적인 경력의 소유자. 그는 <러쎌 웨폰>에서 블루스의 명인 에릭 클랩튼과 호흡을 함으로써 할리우드의 메인 중 한 사람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테리 길리엄과는 <바론의 대모험>에서도 호흡을 같이했다.
하여튼 그의 사운드트랙은 장중하고 암울하다. 그 소리들은 그야말로 ‘철’의 느낌이다. 철갑을 덮은 듯 억압적이며 존재를 규정하는 철의 제도를 사운드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 사이 사이로, 마치 개인적인 추억이나 쓸데없는 몽상, 그리고 그 가운데 비치는 어떤 이상적인 소박함의 동네에 대한 알 길 없는 향수를 자극하는 듯한 묘한 사운드가 교차된다. 그 ‘교차’는 영화 <여인의 음모>, 즉 <브라질>을 잊을 수 없는 명화의 대열에 놓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에서도 보여지는 테리 길리엄의 황당함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이유는 그가 ‘있을 수 없음’을 ‘어처구니 없는 있음’으로 인식시키는 재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어처구니 없이 존재하는’ 현실을 그리는 재주 말이다. 미래의 시공은 그 황당함의 그럴듯함을 표현할 때 어쩌면 유일한 거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하나, 거기 숨은 전략이 들어 있다. 그 거처에서 그것을 있을 법하게 하는 것은 순간순간에 투영된 현재적, 개인적 추억의 아름다움이다. 바로 음악의 묘한 대조가 그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인식시키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발매된 O.S.T 속에서 그러한 힘을 재발견할 수 있다. 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