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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바오밥나무
권은주 2003-11-06

어린 왕자의 소혹성 B612호의 면적은 11평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11평의 아파트를 생각해도 좋고, 그 아파트의 바닥을 구체(具體)로 뭉친 형태를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말건 펴건, 어쨌거나 11평이란 공간은 그리 넓은 곳이 아니다. 아니, 90%의 사람들은 그곳을 좁다고 말한다. 5%의 사람들은 그런 평수가 있는지도 모르고, 나머지는 기권이다.

11평의 아파트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더욱 얘기는 쉬워진다. 공간은 빤하고, 무언가 엎질러지면 야단이 나고, 숨을 곳도 숨길 것도 그곳엔 없다는 사실을- 하루만 살아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대개 그곳에 사는 이는 알게 모르게 청빈하고, 부지런하고, 겸손하게 마련이다. 늘 장미를 돌보고 바오밥나무를 감시해야했던- 어린 왕자처럼.

나는 때로, 집의 면적이 인간의 겸손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면적과 겸손함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면 곤란하다. 말해 무엇하지만, 91평에 사는 인간이라면- 죽어도 홈쇼핑의 라꾸라꾸 침대광고를 보며,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예컨대, 그러하단 얘기다. 라꾸라꾸 침대의 광고를 보며 오호, 하고 침을 흘리는 인간은- 불과 몇년 전까지 11평의 아파트에 살았던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91평이라면, 마치 장미를 키우듯 바오밥나무를 키울 수도 있는 거겠지.

지난 주말 나는 친구의 집들이에 참석했다. 그룹의 친구들 중 세 번째로 40평형대에 진입한 대기업 과장의 집들이였다. 축하해. 이미 40평형에 진입한 친구들도, 아직 40평형에 도달하지 못한 친구들도, 모두가 축하의 술을 한잔씩 주고받았다. 처음 왔을 땐 말이야, 애가 방에 있는데도 한참 찾아다녔지 뭐야. 마치 숨어 있기라도 한 듯, 모두가 모인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2년 만이지? 2년 만이네. 친구는, 지난주 회사에서 실시하는 ‘혁신학교’란 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곳에서 회사의 슬로건인 ‘1등 합시다’를 외치다가- 목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오리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하하하. 술잔을 넘기는 친구의 등 뒤에 선, 검고 푸르스름한 저 슬픔의 바오밥나무.

서른을 넘기면서 내 인생도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도달치 못한 평형에 선착한- 친구의 집들이에 질투가 일지 않았으며, 믿기 힘들게도- 부자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좁은 집에서 살다보니 어린 왕자가 된 것이 아니라- 뭐랄까, 마치 지금의 삶이 군 시절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나 지금 일병 3호봉이야. 나 이번에 상병 진급한 거 알지? 야 야, 병장 계급장은 그저 다는 줄 아냐? 너무나 낯익은- 그 측은한 비교와 부러움에 대해, 이제 나는 기권을 행사하기로 한다. 주특기가 다를 뿐- 우리는 모두 병장을 향해, 혹은 ‘준위’를 향해 달려가는 보병들이었다. 수고했다 친구여. 너도, 나도. 각자의 막사에서 다리를 뻗은,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이 어른은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데 거기서 굶주리며 추위에 떨고 있다. 이 어른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이 모든 사정들도 부족하다면, 지금 이 어른이 되어 있는 예전의 어린아이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어른들도 처음엔 다 어린이였다(그러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들은 별로 없다).- 기억하긴 힘들겠지만, 아주 오래전 우리는 어린 왕자였다. 라꾸라꾸 침대 같은 걸 떠올려도 좋고, 아파트의 바닥을 구체로 뭉친 형태를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마치 소혹성 B612호와도 같았던, 어머니의 자궁은 어떠한가. 이 바오밥나무의 세계에서,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많은 위로를 받아야만 한다. 그대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본 적이 있는가. 별 아래에 선 우리는,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이다. 박민규/ 무규칙이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