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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계단을 내려올 때
2001-05-24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나는 살고 싶다>

I Want To Live 1958년,

감독 로버트 와이즈 출연 수잔 헤이워드

5월26일(토) 밤 10시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영화들은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서사가 일련의 ‘계단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행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불길한 일이 닥친다. 여성은 계단의 맨 위칸부터 한 걸음씩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하강의 연속이다.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어지면, 즉 순차적으로 마지막 계단까지 내려온 뒤 주인공은 슬픈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살고 싶다>는 이러한 서사구조를 지닌 전형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즐기면서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바버라 그레이엄은 범죄자들과

어울리면서 삶이 피폐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살인누명을 쓰게 돼 마침내 사형선고까지 받는다. 이처럼 <나는 살고 싶다>는 보는

이에게 끝없는 ‘추락’의 정서를 제공하는 영화다.

<나는 살고 싶다>는 매춘부와 사기꾼 등을 전전하다가 결국 사형당한 바버라 그레이엄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바버라는 산토스 일행과

어울려 불법적으로 돈을 벌다가 헨리를 만난다. 친절한 헨리에게 바버라는 연정을 느끼고 둘은 곧 결혼한다. 하지만 헨리는 도박에 빠진 상태였고,

아이까지 낳게 된 바버라는 남편에게 폭행당한 뒤 실의에 빠진다. 다시 산토스 일행과 범죄모의를 하는 바버라.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바버라는 일행과

함께 체포된 뒤 살인범 누명을 쓴다. 알리바이를 입증하려던 바버라는 경찰의 수사에 걸려들어 실수로 거짓자백을 하고 만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은 다양한 장르영화를 부단하게 연출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그리고 <신체

강탈자> 등 드라마에서 공포,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연출범위는 다양한 편이었다. 그런데 로버트 와이즈 감독은 거장 반열에 오르기엔

연출작의 기복이 심했고 더욱이 당대 프랑스 비평가들이 평가절하될 감독 중 일순위로 그를 꼽는 등 수모를 겪었다. 비평가들은 작가감독이라기보다는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를 설명하는 ‘해설자’ 역할로 그를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고 싶다>에서 수잔 헤이워드의 연기를 보면

로버트 와이즈 감독에 대한 평가도 조금은 너그러워진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은 무엇보다 배우들 연기를 잘 이끌어냈다. “최상의 연기를 얻기 위해선

감독도 연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을 정도. 영화에서 수잔 헤이워드는 방종한 매춘부와 자애로운 모성 사이를 오가면서 배우경력

중 최상급 수준의 연기를 과시하고 있다. 그녀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굳세게 존엄성을 지키려는 모습, 즉 경찰에게 체포당하기 직전 동료에게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당한 뒤 거울 앞에서 억척스럽게 외양을 가다듬는 연기는 일견 성스러운 경지까지 올라서 있다.

<나는 살고 싶다>는 로버트 와이즈 감독작 중에선 드물게 사회성 짙은 드라마다. 영화 종반부는 다소 지루할 정도로 바버라 그레이엄이

죄를 뒤집어쓴 채 가스실에서 사형당하는 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당시 관객에겐 정서적 충격이었을 법한 이러한 접근법은 아마도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점, 그러니까 왜곡되고 은닉된 사건의 ‘진실’에 좀더 다가서려 했던 감독의 의도로 읽힌다.

김의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