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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삶: <신과 함께 가라>
박혜명 2003-10-30

수학자로 유명한 피타고라스는 자신을 ‘철학자’라 부른 최초의 사람인데,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생을 올림피아 경기 축제에 비유하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태도를 거론하였다. 축제가 벌어지면 그곳에서 장사를 하거나 즐기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기에 참가하여 명예를 얻으려는 사람도 있고, 오로지 묵묵히 그것을 보기 위해 모이는 사람도 있다. 그는 첫 번째 태도를 향락적 태도라 하고, 두 번째를 실천적 태도, 마지막을 관조적 태도라 하는데, 철학자는 여기에 속한다.

철학자가 하는 일이 관조라는 것, 어찌보면 참 한심한 짓이다. 남들은 체험 삶의 현장에서 박터지게 뭘 하고 있는데 자기는 방관자처럼 한 발짝 물러서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뒷짐지고 있는 것은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 분명 비겁한 짓이고 얍삽한 짓이다, 관조는. 이런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 어떤 이는 관조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다들 뭔가에 몰두해 있으면 대세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한 걸음 뒤에서 전체를 조망할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감독이 그래서 있는 거 아니냐, 누군가 이론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사태를 바라보는 것도 그렇게 한가한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는 변명을 하면서 그런 짓에 ‘지식인의 책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글쎄, 아무래도 영 시답지 않은 소리 아닐까.

물론 관조하는 이라도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전혀 할 줄 모르거나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조금은 할 줄 알고, 약간은 겪어봤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관조하는 지식인도 다재다능할 수 있고, 웬만한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취미의 영역에서의 다재다능이고 경험이라면, 달리 말해서 그 재능으로 돈벌이를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해서 ‘할 줄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다 안 되면 언제든 물러설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그에게 절실한 것이 아니었으며, 숨이 깔딱깔딱하도록 괴로울 때 이를 악물고 고개를 넘어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에게 여가활동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관조하는 이, 관객, 구경꾼은 항상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으며, 평생을 피타고라스적인 의미의 철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의 삶은 결국 껍데기의 삶일 뿐이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아무리 몰두해서 화면의 색을 본다 해도, 아무리 귀를 기울여 음악을 듣는다 해도, 아무리 열광적으로 배우들의 몸짓을 좇아다닌다 해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관객의 위치를 넘어갈 수가 없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자기 몸을 깎아넣은 여러 사람들의 삶을 이겨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화들은 영화 자체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영화 속 관객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하며,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이미 카메라는 관객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궁극적으로 관객의 눈으로 찍어낸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활동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떤 관객은 더러 영화의 시선을 좇아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자신의 20대에 파시즘의 시대를 겪은 어떤 관객은 자신이 관객이었던, 봉쇄된 도시에서 벌어졌던 사태를 추억하기도 한다. 연쇄살인이 벌어져 죽어나가는 사람은 있는데, 죽인 자는 잡히지 않는 상황에 총맞고 칼찔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쏘라고 명령한 이는 없는 해괴한 사태가 오버랩되면서, 관객이었던 과거의 자신을 미워하며, 극장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관객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가고 있는,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면서 산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 것은 관객처럼 무심히, 그러려니 하면서 볼 수가 없다. 가슴 아파하면서, 안타까워하면서, 경멸하면서 본다. 인간의 삶은 실천적이든지 향락적이든지이다. 인간은 진정한 관객일 수 없다. 신만이 진정한 관객이다. 그러니 신과 함께 가려면 인간이길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피타고라스가 말한 철학자는 인간이 아닌 셈이다. 그러니 아르보는 참 인간적이다.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