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신문 제22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54 ~ 1955
프랑스 작가주의 꿈틀
프랑수아 트뤼포 “의사(擬似)문학으로 전락” 아버지 세대 영화 비난
새파랗게 젊은 22살의 비평가가 프랑스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1954년 프랑수아 트뤼포는 <카이에 뒤 시네마> 1월호(통권 31호)에 실린 논문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에서 프랑스 영화계의 ‘아버지들’을 정면 공격하고 나섰다.
트뤼포에게 집중포화를 맞은 영화인은 현재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인 장 오랑슈와 피에르 보스트. 트뤼포는 이들이 고전이나 명작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의사(擬似)문학으로 전락시켰다고 비난했다. 곧 “영화를 업신여기는 그들은 마치 범법자에게 직업을 찾아주고 재교육을 시키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대하며 각색의 대상인 원작을 사전 텍스트나 우연 정도로 여겨 불충실하게 각색하는 바람에 원작의 의미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뤼포는 이들의 각색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한 ‘심리적 리얼리즘’ 영화를 도마에 올렸다. 그는 ‘양질의 영화’들은 시나리오 작가의 영화에 불과하며 감독은 시나리오에 그림을 덧붙이는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는 프랑스 영화사의 걸작으로 여기던 <전원교향악> <육체의 악마> <금지된 장난> 등을 폄하한다.
반면 트뤼포는 직접 자기 영화의 대사나 이야기를 쓰는 감독들을 ‘작가’라며 높이 평가했다. 장 르누아르, 로베르 브레송, 장 콕토 등이다. 트뤼포는 이 ‘작가의 영화’는 양질의 영화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심리적 리얼리즘의 존재 이유를 “그 반대급부로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황금마차> 등이 존재하기 위해서”라고 깎아내렸다.
이렇듯 프랑스 영화계의 대가들을 정면 공격하는 트뤼포의 논문은 <카이에 뒤 시네마> 필진들 내부에서도 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논문이 발표됐을 때 일어날 파문이 익히 예상되는데다 앙드레 바쟁이나 피에르 카스트는 트뤼포가 공격한 영화와 감독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편집장인 앙드레 바쟁과 자크 도미올 발크로즈는 이 글을 여섯달 동안이나 책상 서랍 안에 쟁여두었다. 하지만 젊은 비평가인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이 빨리 공개하라며 강한 압력을 넣자 지면에 올린 것이다. 이렇듯 논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불멸의 자이언트로 남다
제임스 딘, 자동차 사고로 24년의 짧은 생 마감
느닷없는 죽음이다. 1955년 9월30일 제임스 딘(James Dean)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넷이다. 속도를 즐겼던 딘은 살아생전 한 인터뷰에서 “만일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넘을 수 있다면, 죽은 뒤에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위대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빠른 속도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재빨리 이 삶을 끝내버렸다.
제임스 딘은 이날 오후 5시58분쯤 그를 태운 은색 포르셰550 스파이더가 로스앤젤레스 446번 도로를 달리다 교차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세단과 충돌하는 바람에 변을 당했다. 딘은 살리나스 자동차 경주에 참여하기 위해 포르셰를 몰고가던 중이었다. 이 사고에서 딘은 머리가 뒤로 꺾이고 운전대 기둥의 압력 때문에 가슴이 부서지는 상처를 입었고 구급차로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사망했다. 딘과 동승했던 기술자 롤프 뷔터리히는 심하게 다쳤으나 생명이 위험한 지경은 아니었고, 딘의 차와 충돌한 세단의 운전자 도널드 턴업시드는 몸에 멍이 든 정도였다.
딘은 며칠 전 엘리자베스 테일러, 록 허드슨과 함께 <자이언트>의 촬영을 마쳤다. 그 전에 니콜라스 레이 감독과 함께 찍은 <이유없는 반항>은 10월26일로 개봉일이 잡혔다. 이제 관객은 이 영화들을 보면서 세상에 없는 그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인디애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딘은 UCLA의 제임스 휘트모어 드라마 클래스에서 연기를 배웠고 1952년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이어 엘리아 카잔에게 발탁, <에덴의 동쪽>에 출연하면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페데리코 펠리니, 탕자인가 선구자인가
신작 <길> 둘러싸고 네오리얼리즘 정체성 논란
이탈리아의 젊은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동료이자 선배인 영화인들로부터 큰 비난을 사고 있다. 네오리얼리즘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 쏟아진 비판의 요지다. 1954년 베니스영화제에 최초 공개돼 은사자상을 수상했고, 해외에 배급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길>(La Strada)은 선배들이 보기엔 네오리얼리즘을 배신한 탕자일 뿐이었다.
그들의 비난은 가혹했다. 자바티니는 펠리니가 <길>에서 “현실로부터 도주하고 있다”라고 공격했다. <치네마 누오보>의 편집자인 구이도 아리스타르코는 “그의 영화에서 현실은 상징적인 도식으로 변질되고 또한 설화가 역사로 탈바꿈하기 위해 역사적인 본질이 지양된다”라고 평가하면서, “축복받은 영화감독임이 틀림없는 펠리니는 ‘암시’라는 기만적인 길에 올랐다”고 비아냥거렸다. 펠리니도 가만히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한때 선배로 모셨던 네오리얼리스트들과 공박을 거듭했다.
무엇보다 그를 화나게 한 것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비난이었다. 곧 비스콘티는 “<길>은 어떠한 관점으로든 네오리얼리즘 경향의 영화가 아니다”라고 밝힌 뒤 펠리니가 신추상주의를 고안해냈다고 말했다. 펠리니는 이 ‘신추상주의’라는 말에 발끈했다. 펠리니는 비스콘티에게 “추상적인 접근방식의 난점을 극복했으며, 또 개인적이고 풍부한 영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사회적이고 미적인 도식성을 무시했다”고 응수했다.
펠리니는 스스로를 네오리얼리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배들의 비난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방비 도시>의 제작에 참여한 이후 자신이 쭉 네오리얼리스트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네오리얼리즘을 좁은 의미에서 해석하는 데 반대했다. 그에게 네오리얼리즘은 “현실을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었다. 그는 또한 “사실주의는 일차원적인 공간이 아니며, 하나의 풍경은 다양한 층을 포함하고 있다”라며 사실주의의 표층 아래를 부유하는 실존적 진리를 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젤소미나와 잠파노를 통해 그가 보여주려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민족적 현실을 다루겠다”
네오리얼리즘 감독들 창작의 자유 요구
수세에 몰린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이 ‘이탈리아 영화 강령’을 선언했다. 루키노 비스콘티,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 주세페 데 산티스 등은 프랑스 영화잡지 <포지티프> 1955년 11월호에 이같은 선언문을 발표하고 정부에 대해 창작의 자유 보장을 요구했다. 곧 이들은 “우리는 이탈리아 정부가 공공기관이나 언론매체 그리고 은행을 통해 네오리얼리즘영화가 민족적 현실이 요구하는 주제를 다루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비난한다”라고 밝히면서, 표현의 자유를 저지하는 법망의 종말을 요구했다. 이들의 선언문은 그해 여름 총리인 퐁티가 네오리얼리즘에 대해 밝힌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작성됐는데, 퐁티는 “유용하기보다는 파멸적인 이탈리아영화의 역할에 대해서 엄격한 제한을 설정하고 무절제한 라틴적 특성을 억제해야 할 시점”이라면서 “영화는 현실 도피이며 휴식이고, 가난을 잊게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괴수 영화의 신화
1954년 일본에서 대괴수 ‘고지라’가 탄생했다. 본래 쥐라기의 거대 생물이었던 고지라는 수소폭탄 실험이 퍼트린 방사능에 의해 되살아나 인류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대포, 미사일, 고압전류 등 어떠한 근대무기로도 고지라를 이길 수가 없다. 혼다 이시로 감독이 창조한 <고지라>는 9년 전 원자폭탄 투하 때 일본인들이 겪었던 공포를 환기해내며 865만명의 관객을 동원,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로 시대극으로 돌아온 구로사와 아키라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백치> <살다>에서 연이어 현대물을 다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54년 에서 다시 시대극으로 돌아갔다. 도적떼에 맞서기 위해 농민들이 7명의 사무라이를 고용하고,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마을을 지켜낸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 동시에 선전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애초의 착상은 ‘1인의 사무라이’였다는 사실. 그런데 어쩌다 7인이 됐을까?
처음엔 사무라이 한 사람의 하루를 그리는 영화를 기획했다고 하던데. 맞다. 그런데 사무라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도적떼에 맞서기 위해 농민들이 사무라이를 고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재미있겠다 싶었다.
7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나온 건가. 프로듀서에게 대충 영화 내용을 얘기하니까 제목을 뭘로 할 거냐고 묻더라. 그래서 그 자리에서 ‘7인의 사무라이’라고 말해줬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감으로 대답한 거다. 결국 7은 마을을 지키는 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숫자였다.
듣자하니 <살다>에서 스탭들이 다시는 구로사와와 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당신이 ‘이번에는 통쾌한 오락영화니까 간단해’라고 꼬드겼다고 하던데. 그런 기분으로 시작한 건 틀림없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역시 쉽지 않더라. 예를 들어 마을에 쳐들어온 도적떼가 33명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여가는데 죽일 때마다 그걸 확실하게 계산해놓아야 했다.
가 농민을 바보로 만들었다는 영화평도 있더라. 나도 ‘구로사와는 귀족 출신이니까 농민들을 바보 취급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이 사람들이 과연 영화를 끝까지 보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부분의 대사, “이긴 건 우리가 아니야, 저 농민들이야”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모두 전했다. 이 영화는 잡탕이랄 수 있다. 나는 장어구이 위에다 커틀릿을 얹고 그 위에 카레를 뿌린 듯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 인터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천재이다>에 실린 구로사와와의 대담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단 신 들
찰스 로튼, 늦깎이 감독 데뷔
1955년. 55살의 늦깎이 신인감독이 탄생했다. 영국의 대배우 찰스 로튼이 그 주인공으로, 그는 필름누아르 스타일의 범죄영화 <사냥꾼의 밤>으로 감독 데뷔했다. 로버트 미첨이 한손에는 증오, 한손에는 사랑이라는 문신을 새긴 사악한 목사로, 릴리언 기시가 그에게 쫓기는 아이들을 지켜주는 노부인으로 열연한 이 영화는 기괴한 스타일로 평론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흥행에도 실패했다.
블랙 여우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 후보
도로시 댄드리지가 흑인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2월, <카르멘 존스>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댄드리지는 그레이스 켈리, 오드리 헵번, 주디 갤런드, 제인 와이먼과 함께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동화의 나라 디즈니랜드 오픈
1955년 6월18일, 디즈니랜드가 오픈했다. “미국을 만든 이상, 꿈, 투쟁에 헌정된” 디즈니랜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상상의 세계를 아이들이 걷고 뛸 수 있는 현실의 나라로 옮겨놓은 동화의 나라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고속도로로 반시간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 디즈니랜드는 규모 면에서 150ha에 이를 만큼 거대하며, 건축비로 1700만달러가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