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백인 인파가 와글거리는 밀라노역에서 일본 연인이 만난다. 백인들은 무관심하다는 듯 지나가고 일본 사람들은(물론 여배우는 홍콩 배우지만) 클로즈업된다…. 일본이 만든 이 국제적인 배경의 사랑 이야기를 보다보면 적어도 일본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이중의 쾌감을 선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사람들은 이처럼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즐기면서 동시에 유럽의 배경 속에 아무런 장애없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는 자기네 사람들을 보는 일 자체를 즐긴다. 달리 말하면, 일본 사람들은 늘 자신들이 1세계의 완전무결한 성원임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러한 심리는, 은연중 일본 사람들의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왜 그런지 밀라노나 피렌체의 그 인파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짐짓 연기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 영화는 일본 영화계가 ‘국제적인 기획’ 마인드를 발휘할 능력과 힘,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잘 보여주는 영화다. 이탈리아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헌팅하여 그 핵심부위를 영화의 배경으로 쓰고 있는데다가 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3개 국어가 자연스럽게 교차되도록 내러티브를 잘 짜놓고 있다. 음악도 전형적인 일본 연애영화의 O.S.T에서 들을 수 있는 선율들을 흐르도록 하면서 동시에 세계 팝 시장에서 주류 가수에 속하는 여가수인 엔야를 캐스팅하여 영화의 국제적인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엔야, 하면 아일랜드 민요풍의 창법을 뉴 에이지적인 접근법과 혼합시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만하다. 울림효과를 잔뜩 먹인 그녀의 아름답고도 신비스러운 목소리는 잘 닦인 거울처럼 너무 깨끗하여 어딘지 디지털 신시사이저의 합성음을 연상시키는 ‘비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너무 잘 닦인 거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듯, 그녀의 목소리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디지털 이펙터들로 정교하게 손질을 보았을 그 오묘한 울림은 엔야의 목소리가 가진 순수함을 공중으로 띄우고 저 멀리, 먼 숲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깊이깊이 보낸다. 그래서 그 주인공은 ‘기술적으로’ 마치 사이렌처럼 사라지고 없다. 그녀가 가진 매력이 그저 ‘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 천부적인 목소리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이외에 이처럼 탈주체적인 목소리의 처리에서 나온다. 어떤 면에서는 바로 이러한 엔야의 특징이 뉴 에이지 음악의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뭔가 인간성의 회복을 꿈꾸는 듯한 뉴 에이지는 정작 탈주체 시대의 아바타적 주체의 어떤 메아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엔야의 목소리는, 극중 인물들의 마음을 나중에 가서야 확인하게 되는 연애심리극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인물의 본심은 그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고 여러 과정을 거친 뒤에야 드러나는데, 이러한 내러티브의 처리는 베일에 싸인 듯 공중에서 감기는 엔야의 목소리 처리와 부합하는 면이 있다. 상호 상승작용에 의해 이 영화의 O.S.T이기도 한 엔야의 새 앨범 <For Lovers>는 발매 한달 만에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하기도 한다. 이 다운로드의 시대에 100만장이라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알게 된 것인데, 가요 음반들이 완전히 죽을 쑤는 와중에서도 뉴 에이지 음반들은 놀랍게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순수를 열망하는 뉴 에이지의 상업성이라. 이만한 이율배반을 또 보기가 영 쉽지 않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