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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이다혜 2003-10-23

그러니까 옛날인데, 로버트 윌슨이란 인물이 있었다. 영국인이었고, 런던에서 병원을 개업한 외과의사였으며, 남자였다. 울컥, 하지 마라. 고작 그런 이유로 로버트 윌슨이 유명해진 것은 아니니까.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영국과, 런던과, 병원과, 남자와는 아무 상관없는- 말해 무엇하지만 한장의 괴수(怪獸) 사진이었다.

세월은 흘러 윌슨의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네시’의 사진이 되었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로 네시가 목을 내민- 그렇다. 1934년에 촬영된, 당신도 분명 봤음직한 문제의 그 사진. 문제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일어났다. 85살을 일기로(참 오래도 살았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로버트 윌슨은 여덟명의 네시 학자를 자신의 병실로 불러모았다. 적게는 십수년에서 오래는 삼십년이 넘게 네시를 연구해온 학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진은… 뻥이었어. 뻥이 아닌 이 이야기는 외신을 타고 세계 각국에 전파되었고, 결국 영국과, 런던과, 병원과, 남자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라는 인간의 식탁 위에도 한장의 조간이 되어 실려왔다. 된장국을 먹으며, 나는 여덟명의 네시 학자를 생각했다. 뭐랄까, 휘휘 저어대는 된장국 속에도 네시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일요일 아침의 일이었다.

그뒤 오랫동안, 나는 “아니면 말고”를 읊조리는 로버트 윌슨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했다. 본 적은 없지만, 마치 네시처럼 그 얼굴은 서서히 어떤 윤곽을 띠어갔고, 결국 하나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영국과, 런던과, 병원과, 남자라기보다는 - 한국과, 청와대와, 국회와, 늙은 변태와 상관있을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이럴 수가, 영국인의 얼굴이 아니잖아. 도대체 머리 속이 어떻게 된 거지? 알고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란 것은 영국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마치 로버트 윌슨처럼, 그렇게, 말이다. 뭐? 그리스야말로 의회 민주주의의 진정한 시초라고? 울컥, 하지 마라. 아니면, 말고.

세상은 “아니면 말고”를 외치는 인간들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통령을 하다가 아니면 말고. 정당을 만들었다가 아니면 말고. 회사를 차렸다가 아니면 말고. 사기를 치다가 아니면 말고. 성추행을 하다가 아니면 말고. 묵묵히, 이런 글을 쓰다가 아니면 말고.

네시는 없다. 얼마 전 BBC는 그런 결론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600차례에 걸친 음파탐지와 위성추적을 이용한- 50년 네시 연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열대 지역의 물을 좋아하는 고대 생물이 네스호의 찬물에서도 살 수 있다고 의 탐사팀은 확신했었다. 또 사경룡의 행동양식을 알기 위해 악어, 장수거북 등 현대 해양파충류의 생태습관을 조사하기도 했고, 고성능의 음파탐지기로 네시의 폐에서 나오는 공기를 포착할 수 있다고도 확신했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실제로 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탐사팀은 네시에 대해 결론지었다. 묘하게도, 대통령이 자신의 재신임 문제에 대해 스스로 거론하던 날 저녁의 일이었다. 아니면 말고. 보고 싶은 것을 실제로 본 것으로 착각했을 뿐, 정치(政治)는 없었다.

이제 나는- 현대 해양파충류의 생태습관을 조사하듯- 걸었던 모든 기대들을 회수하기로 한다. 모쪼록 된장국이라도 휘휘 저으며, 뭐 어때. 아니면 말고. 어쩜 이리도 역전이 없는 나라인가, 아쉽기도 하지만- 바로 그 찰나, 보아라 IT강국인 우리 대한민국 다음의 인터넷 창에 베너광고가 뜬다. “커피관장하면 살 빼고 인생역전” 그렇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 이 땅의 로버트 윌슨들이 인생역전을 일굴 때까지, 커피관장이라! 600차례에 걸친 음파탐지와 위성추적에 비한다면, 이 얼마나 쿨한 해결책인가. 자, 벌려라. 커피는 맥심이다. 박민규/ 무규칙이종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