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이던 치안유지법의 외아들이다. 일제가 물러간 뒤 남한사회는 일제에 붙어 영화를 누리던 부역자 세력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한민국은 세계사에서 가장 더러운 피를 가진 공화국이다. 아무런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남한의 지배세력은 국가보안법을 통해 남한사회를 반공주의 파시즘 체제로 만들어갔다.
반세기 동안 남한은 반공주의의 수용소였다. 학문과 종교와 예술을 포함한 남한의 모든 정신활동은 국가보안법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했다. 반공주의 파시즘을 제외한 모든 의견은 모조리 공산주의적 활동이자 친북 활동으로 규정되었다. 사회주의도 아니고 혁명도 아니고 단지 민주주의와 자유를 생각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국가보안법은 단 한번도 ‘나라를 지키는’ 법이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된 건 90년대 이후, 반공주의 파시즘의 절대적인 권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매우 한정된 사람들끼리나 알고 있던 ‘국가보안법의 비밀’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90년대 말에 이르러선 최소한의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21세기의 첫해가 뜨기 전에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거나 적어도 개정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21세기가 된 지 3년이나 지난 오늘 여전히 건재하다. 그 배후에 거대한 타협이 있다. 국가 권력은 그 법을 조금은 덜 야만적으로 보이게 사용하는 대신, 국가보안법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은 그 법의 존재에 잠시 눈을 감는 타협 말이다. 송두율씨를 둘러싼 이런저런 상황들은 그런 거대한 타협의 실체를 송두리째 드러낸다. 민주화운동 이력과 국가보안법에 의한 상흔을 훈장처럼 달고 행세하는 자들은 말한다. “정말 몰랐다.” “당혹스럽다.” “국민에게 사과한다.”
국가보안법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온 극우 세력과 파시스트 언론이 이 맛난 먹이를 놓치려 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쥐어뜯고 할퀴고 뒤에서 찌르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너무 심하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국가보안법으로 송두율을 말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몹시 곤혹스러운 얼굴로 ‘관용’을 말한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관용을 애걸하는 건가. 파시스트들에게? 반세기 동안 빨갱이의 딱지를 쓰고 광장에 끌려나온 사람들에게 ‘죽여라!’라고 외쳐온 잘난 국민들에게?
송두율이 노동당원이면 어떻고 민노당원이면 어떤가. 송두율이 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들어가면 어떻고 남한으로 들어오면 또 어떤가. 그런 건 분단 덕에 영화를 누려왔기에 분단이 영원하길 바라는 놈들에게나 상관있는 일이다. 분단 조국을 둔 지식인이 남북을 넘어 민족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독일이라는 제3국에 거주하는 지식인이 반세기 동안 반공주의 파시즘이 지배해온 남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지식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송두율의 이런저런 행적들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지식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식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송두율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질문하기 전에 “국가보안법은 어떤 법인가?”라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 질문은 주먹을 쥐고 소리치는 별스런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국가보안법의 비밀’이 밝혀져 있고 그 법에 당하는 사람이 실재하는 이상 그 법에 눈감는 일은 노예의 행동이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에 반대한다면 그 법을 무시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전제로 한 송두율에 대한 어떤 의견이나 조치도 무시해야 한다. 누가 감히 추방을 말하는가. 누가 감히 관용을 말하는가. 이 더러운 공화국에서.김규항/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