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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마력이 내뿜는 불안정성의 매력,<고독한 영혼>
권은주 2003-10-22

선뜻 위대한 ‘걸작’의 반열에 올리기엔 좀 망설여지지만 언제 보아도 설명하기 힘든 강렬한 매력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 영화들이 있다. 니콜라스 레이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독한 영혼>이 바로 그런 영화다. 괴팍하고 폭력적이며 비타협적인 시나리오 작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심리극,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편의 음울한 필름누아르, 언제나 ‘너무 늦게’(too late) 손짓하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희생되는 연인들에 관한 비극적 멜로드라마 등등 이와 같은 식으로 <고독한 영혼>을 기술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는 이 영화가 간단없이 불러들이는 매혹적인 공포의 세계에 작별을 고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인 딕슨 스틸(험프리 보가트)은 한 여자에게 자신이 각색을 맡은 소설을 대신 읽고 줄거리를 정리해달라며 그녀를 집으로 초청한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교살되어 버려진 시체로 발견되고 딕슨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꼽힌다. 그러나 이웃에 살고 있던 로렐 그레이(글로리아 그래험)라는 여인의 증언으로 딕슨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딕슨과 로렐은 서로 가까워져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만 딕슨의 다혈질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해 로렐은 점점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 그가 범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기에 이른다.

언뜻 <고독한 영혼>은 흔히 쓰는 표현으로 ‘인간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악’을 심리적으로 다룬 범죄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주인공 딕슨 역을 맡은 험프리 보가트의 연기에 집중하다보면 더더욱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불길함은 지극히 ‘비인격적인’ 악의 편재성(遍在性)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고다르를 위시한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로부터 그 누구보다도 시각적인 감독으로 꼽혔던- 고다르의 말, “<자니 기타>(1954)나 <이유 없는 반항>(1955)을 보고 나면, 소설이나 연극 혹은 다른 그 어디에서가 아니라 스크린 위에서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여지게 되는, 오직 영화에만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답게 <고독한 영혼>은 이러한 속성을 지닌 악의 마력을 보는 이의 두눈을 향해 강렬하게 발산한다.

예컨대 딕슨이 자신의 군대 시절 부하이자 현직 형사인 니콜라이와 그의 아내 앞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정황을 상상하여 들려주는 장면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니콜라스 레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딕슨의 모습을 보여주고 난 뒤 호기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니콜라이 부부의 모습을 잡은 반응숏을 삽입한 다음, 다시 딕슨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때 보여지는 숏은 자세히 보면 앞의 숏과 조명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다. 이야기에 몰입해 있는 딕슨의 눈가엔 밝은 조명이 가해져 있고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어둠에 잠겨 있는 듯 보인다. 이는 딕슨의 이야기를 듣는 니콜라이 부부와 그들처럼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을 관객의 심리적 상태를 설명함과 동시에 무엇보다 어느새 딕슨의 몸에 깃들어 광채를 발하고 있는 악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딕슨의 이야기에 몰입되어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목을 조르고 있는 니콜라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

문제는 이처럼 비인격적인 악이 작가 딕슨의 창조력의 원천이라는 점에 있다. 레이는 <고독한 영혼>에서 분명 광포한 예술가라고 하는 다소간 낡은 이미지를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에 의해 생산된 예술과 그를 둘러싼 삶 모두를 부정함으로써 그러한 이미지가 낭만적으로 신화화되는 것을 철저히 가로막는다.

평론가 데이브 커는 <고독한 영혼>의 주제는 “불안정성의 매력”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고독한 영혼>은 당대 그 어떤 할리우드영화의 그것보다도 기이하고 슬프며 갑작스럽고 불편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영화 속의 딕슨-로렐 커플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지고 딕슨의 결백이 입증된 순간, 즉 불안정성이 해소되는 바로 그 순간 파국을 맞는다. 딕슨이 쓴 시나리오의 대사 가운데 하나이자 로렐에 의해 읊조려지는 <고독한 영혼>의 마지막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그녀가 내게 키스할 때 태어났고 그녀가 날 떠날 때 죽었다. 난 그녀가 날 사랑했던 몇주 동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어찌보면 딕슨과 로렐 모두에게 낭만적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진술의 주어(나)와 진술을 발화하는 주체(로렐)가 일치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고독한 영혼>은 악의 감촉에 온전히 사로잡힌 세계에서 비극이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In a Lonely Place|1950년|94분|흑백|감독 니콜라스 레이|출연 험프리 보가트, 글로리아 그레이엄|화면포맷 4:3|오디오 돌비디지털 모노|지역코드 3|자막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출시사 콜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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