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문화원에 대해 엄청나게 감상적인 추억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가끔 예전이 그립긴 해요. 그래도 프랑스문화원이 뭔가 특별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때를 기억하니까요. 프랑스문화원에서 16mm필름을 틀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많은 영화들을 지금은 쉽게 볼 수 없기도 합니다. 시네마테크의 상영작들은 대부분 ‘걸작 리스트’에 고정되어 있고(하긴 잘 가지도 않습니다만,) DVD로 구할 수 있는 프랑스영화들도 제한되어 있거든요(고로 전 전세계 모든 DVD에 의무적으로 영어자막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제가 종종 찾아헤매는 ‘작은’ 프랑스영화들은 찾기가 힘듭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그 향수어린 기억입니다. 뤼미에르극장의 불편한 의자와 낡아빠진 16mm의 흐릿한 화면이 제공하는 그 흐뭇한 느낌 말이에요. 사실 영화 볼 때는 무척 불편했습니다. 화면 아래를 가리는 앞사람들의 머리 때문에 목에 힘을 잔뜩 주고 곡예를 했던 게 기억나는군요. 지금이야 푸근한 추억으로 남았다지만 사실 별로 좋은 게 아닙니다. 영화를 볼 때 편하고 기분이 좋아야죠. 영화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한 지금에 와서 푸근한 추억으로 떠올리는 게 뭐가 좋단 말입니까? 낡은 기억들은 좋건 싫건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에요. 게다가 옛 기억을 조작하는 건 쉽습니다. 항히스타민제를 먹은 뒤 커피 가루에 코에 박고 아무 생각이나 해보세요. 다들 그럴싸한 추억으로 느껴질 겁니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제 향수를 자극하는 두 번째 이유는, 제가 한동안 꽤 사랑했던 장르, 즉 영국식 퍼즐 미스터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작가가 복수를 계획한다는 이 어두운 이야기는 원래 동명의 영국 추리소설이었지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아빠인 세실 데이 루이스가 니콜라스 블레이크라는 필명으로 쓴 일련의 <나이젤 스트레인지웨이즈> 시리즈 중 한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전 어렸을 때 이 ‘문학적 사립탐정’과 이 위태로운 구조의 소설도 좋아했습니다. 샤브롤이 <야수는 죽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혹시 그게 이 소설의 영화 버전이 아닌가 궁금해했던 게 기억나요. 한참 열심히 조사한 뒤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흥분했었는지요. 그뒤로 매달 프랑스문화원의 상영시간표를 조사하다 그 영화를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전 주저하지도 않고 문화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스트레인지웨이즈가 등장하는 후반부를 완전히 잘라버린 각색이 불만이었던 기억이 나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샤브롤에게도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겁니다.
이 작품은 <야수 같은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오래 전에 비디오로 출시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비디오 가게에서 확인했으니 분명해요. 우울한 심리 서스펜스물인 영화가 액션영화처럼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요. 아마 봐도 예전 같은 재미는 없을 겁니다. 일단 비디오 테이프는 필름처럼 우아하게 늙으며 향수를 자극하지는 않거든요. 그러고보면 제가 머릿속에 품고 있는 프랑스문화원에 대한 추억도 그렇게까지 거짓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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