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소설가, 극작가, 자연철학자였던 괴테(1749∼1832)의 긴 창작 생애에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주요 작품만으로 따진다면, 그가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낸 것이 스물다섯 때이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쓴 것은 마흔일곱이 되어서의 일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일흔둘에 그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여행> 완결판을 내고 또 거기서 11년 뒤인 여든셋에 극시 <파우스트> 제2부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해에 그는 죽는다. 그가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죽었다는 것이 꼭 특별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특별한 것은 그가 근 60년 동안 마르지 않는 샘처럼 ‘창조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사람에게 여든셋이란 이미 적당히 노망기 들거나 혼미해져 코끼리 다리가 넷인지 다섯인지 기억하기 어렵고 기억하는 일조차 귀찮아질 만한 나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이르도록 창조력이 왕성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비범한 힘의 비밀은?
괴테의 어떤 시편에는 이 비밀의 단서 하나를 제공하는 듯이 보이는 대목이 한 군데 나온다. 그가 자기 부모를 회고해서 쓴 듯한 구절이 그것인데, 풀어쓰면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을 물려받았다.”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Lust zu fabulieren)이라? 이 즐거움은 무슨 생물학적 디엔에이(DNA)가 아니라 괴테가 어머니에게 배워서 알게 된 즐거움- 경험과 체득의 디엔에이임에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괴테의 어머니는 ‘이야기’로 아들을 키운 여자이다. 셰헤라자데처럼 그녀는 어린 괴테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어머니, 말하자면 ‘아들의 셰헤라자데’이다. 그녀는 회고한다. “바람과 불과 물과 땅- 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어머니의 회고는 좀더 계속된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이의 눈은 잠시도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어떤 인물의 운명이 그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원치 않는 쪽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아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리고, 그가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엄마, 공주는 그 못된 양복쟁이하고 결혼하면 안 돼. 양복쟁이가 악당을 쳐부순다 해도 말야.’ 그럴 때면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멈추고, 결말은 다음날 밤으로 미루었다. 그런 식으로 내 상상력은 가끔 아들의 상상력과 자리를 바꾸었다. 어떤 때는 바로 다음날 아침 그가 바라던 대로 주인공의 운명을 고쳐 이야기해주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 넌 벌써 짐작하고 있었지? 결과는 네가 생각한 대로 된 거야.’ 그러면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빛났고, 나는 그의 어린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괴테의 놀라운 창조력이 오직 어머니 덕분이었다는 식으로 한 군데로만 몰아 창조성의 원천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조성의 다른 이름은 상상력이며, 괴테의 경우 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워준 첫 번째 공로자는 밤마다 별과 별 사이에 길을 놓아주었던 그의 이야기꾼 어머니이다. 더구나 그 길 놓기는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다. “가끔 내 상상력은 아들의 상상력과 자리를 바꾸었다.” 괴테의 어머니는 어떤 정해진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들의 예민한 반응에 적절히 반응하고 아들과 함께 이야기를 만든다. 반응은 이미 상상력의 참여이고 발휘이다. 이야기 들려주기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라 ‘아들과 자기 사이의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을 괴테의 어머니는 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이 반응하고 그 반응에 어머니가 반응함으로써 화자와 청자는 서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극받는다. 이 자극은 이야기 지어내기를 즐거운 일이게 한다.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를 즐겁게 나는 상상력은 또 별과 인간을 잇고, 지상의 별들인 사람과 사람의 가슴 사이에, 사람과 개구리 사이에 길을 놓는다.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이고 연결하기이다. 이 연결의 능력이 상상력이다.
교육열 높다는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동화책 사다 던져주고 “네가 읽어”라 말하거나 무슨무슨 학원으로 내쫓음으로써 할 일을 다 했다고 흔히 생각한다. 비디오만 열심히 틀어주는 부모도 많다. “내가 시간이 어딨어?”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 ‘우리’에게 괴테의 어머니는 말한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라, 함께.”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