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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본질:<충킹 익스프레스>
2003-10-02

#1

어릴 때 소원. 지내놓고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 당시의 절실함과 오늘의 유치해보임이 맞물림. 맞물림으로 인해 유치함이 더 커짐. 소원 내용의 비객관적, 비맥락성. 오로지 상상 속에 구축됨. 판타지와 다르지 않음. 어릴 때 소원이 첩보원인 사람. 그게 생겨난 건, 머리털나고 처음 본 영화가 이었기 때문. 소원은 그랬으나 큰 다음에는 군대 빠질 궁리부터 하게 마련. 당해봐라.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가끔 기특한 소원도 있음. 거듭거듭 기특해 보이는 소원. 빨리 어른이 되는 것, 빨리 늙는 것, 빨리 죽는 것.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음. 조숙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아이들이 유치해서가 아니라. 그냥. 이건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고. 결국 다 죽음의 문턱에서 보면 부질없는 사건들일 뿐이라는 자각이 들어서도 아니었음. 어리다는, 젊다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열병 따위를 두려워해서도 아니었음. 어른들의 느긋함이 부러웠을 뿐.

제일 바쁜 사람 임청하. 담배 피운다. 끊임없이 피운다. 하이힐 신었다. 그거 신고 부산하게 돌아다닌다. 다른 사람들은 덜 바쁨. 주크박스 음악에 맞춰 몸을 비벼대는 아이. 아예 늘어져 있음. 세상을 다 살아버린 어른 같음. 임청하만 어린아이 같음.

“날마다 똑같은 건 아니잖어∼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거 아녀∼.”

진짜 세상을 다 살아버린 건 임청하. 권태롭게, 담담하게 권총을 쏜다. 또박또박 걸어간다.

“it’s not everyday… there must be a change….”

그의 담담함에 갈채를.

#2

촐싹대는 것들에게 옆차기를.

머리를 등 뒤로 길게 기른 적이 있음. 전혀 폼이 나지 않았음.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나오는 지배인 흡혈귀 같았음.

캘리포니아 기후의 특징. 건조함. 관절염 치료에 좋음.

묶은 머리를 풀어헤친다. 뚜껑이 열리는 스포츠카에 편승한다. 캘리포니아의 프리웨이로 나가자고 조른다. 프리웨이에서 악을 쓰면서 차를 달린다.

건조한 바람. 따갑기만한 햇빛. 물기가 쫙 빠져나간 몸. 버석버석해짐.

캘리포니아는 이제 기회의 땅이 아님. 노년의 땅. 영어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문 땅. 9살에 영어 읽는 게 교육의 목표가 되어버린 땅.

결론. 관절 부실한 노인들 요양지로 추천함. 뉴욕 사는 아가씨들이 가끔 가서 희한한 경험하기 좋은 곳으로 추천함.

타인의 삶에 슬그머니 끼어들어감. 도플갱어 아님. 재밌는 일. 그것도 어깨가 깨질 정도로 복작복작한 공간에서. 촐싹대는 사람 밥맛없다. 그 짓 하면서 촐싹대는 거.

#3

추억은 노란 비옷과 같은 것. 언제나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입고 있는 것.

누구나 걸칠 수 있는 건 아니지. 기억이 있어야 한다. 기억. 외부에서 벌어진 일을 내부로 집어넣는 육체적 정신적 행위. 집어넣고 차곡차곡 쌓는다. 정리정돈한다. 데이터베이스 만든다.

어른이 되어, 죽을 때가 되어 돌아본다. 굴곡도 보이지 않음. 순간 순간의 장면만 솟아났다가 가라앉았다가.

추억이 그거다. 사람은 추억을 가질 수 없다. 기억을 가질 수 없으니.

날 때부터 노란 비옷을 걸치고 나온 사람만이 추억을 가질 수 있다.

그게 맞나? 그게 본질인가?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