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삶’이란, <도그빌>에서의 그레이스처럼 일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하면 좋지만 내가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다. 청소를 하는 일이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또는 자동차를 만들거나 서류를 정리하고 주가를 체크하고, 선거에 출마하고 다시 빨래를 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따위의 일일이 헤아리자면 수억 가지는 될 ‘사회활동과 직업’들이 꼭 필요한 일이지만 또 집요하게 따지고 보면 사실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다. 그 일들이 처음에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절한 역할찾기에서 시작되지만, 그렇게 엮이다보면 어느새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진리를 만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무섭고, 교묘하며 완벽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기 전에는 이 굴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우연한 방문으로 시작된 도그빌에서의 생활이 어느새 커다란 쇠수레바퀴가 달린 쇠사슬을 목에 걸고 고된 노동을 하고 또 마을 남자들에게 몸을 능욕당하며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그레이스처럼 우리 사는 모양이 꼭 그렇다.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과 호감을 받으며 자라면서 ‘나는 이 다음에 무엇무엇이 될 테야’ 하며 꿈도 키우고, 그 꿈을 이루고 사회에 행복한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사회의 구석구석을 뒤져서 내가 할 만한 일을 찾는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일을 잘할수록 이 사회에서 행복한 정착민이 될 자격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착한 생각이었는데 중년쯤 되어 정신을 차려보면 사는 게 너무나 고단하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린 걸까? 다니는 직장과 하고 있는 일은 원래 내가 좋아하는 일도 아니었고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일도 아니지만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래저래 따지고 보면 앞으로 갚아야 할 빚도 많고 당장 갈 데도 없고 먹고살 길도 없으며, 무엇보다 부모와 자식의 생계까지 볼모로 잡혀 있다. 그렇다. 가족이란 이 사회가 숨통을 쥐고 있는 인질이다. 그런데 가족이 있기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가족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거대한 시스템이 이 사회이다. 이 세상에 들어선 이상, 여기서 살려면 각종 ‘주민세’를 내야 한다. 산다는 것은 몸과 노동력을 끝없이 지불해야 하는 과정이다. 이 세상은 거대한 도그빌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필요 이상의 노동과 쇠사슬과 같은 규제 속에서 살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 세상은 이미 누구누구의 ‘소유’인 세상에 태어난 까닭이다. 도그빌에 기득권을 가진 원주민이 있듯이, 이 세상에는 내가 태어날 때 모든 땅에 이미 주인이 있다. 기가 막힐, 어떻게 땅주인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내가 우주공간에 살지 않는 이상 어떤 일을 해서든 집세를 내거나 내 땅을 사야 하고, 남의 땅에서 경작된 곡물을 사먹어야 한다.
‘이 땅은 내 땅’이란 말은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과 다를 바가 없는 말이지만 이 지구상에서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당연할 수 있으랴. 모든 생명체는 태어난 이상 ‘무조건’ 발딛고 먹어야 하거늘 인간은 내 몸 두고 내 몸 먹이는 데 조건이 너무 많다. 인간들이란, 말만 통한다면 참새나 개미들에게까지 세금을 내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참새나 개미들 역시 먹고사는 대가로 세금을 내려면 굳이 그들이 하지 않아도 될 많은 일들을 해야 할 것이다. 참새나 개미들이 거부한다면? 인간들은 투표를 하겠지. 투표의 안건은 ‘참새에게 자유를 줄 것인가, 안 줄 것인가’가 아니다. ‘참새를 멸종시킬 것인가, 계속 세금을 내라고 말로 타이를 것인가’쯤 되겠다. 투표란 공범자를 확보해서 집단폭력을 합리화하는 과정이다. 정리해보면, 땅주인이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요 투표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인데,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만든 체제 중 그중 나은 것이니 이 속에서 ‘가난한 소수’의 고단한 체류는 어찌할 거나.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kongtem@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