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동네에 무당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종종 ‘덩덩 덩더쿵’ 신나는 굿판이 벌어지곤 했다. 아이들은 굿 구경을 하다 굿이 끝나면 그 음식들을 받아먹기도 했는데, 나는 왠지 꺼림칙해서 그걸 받아먹지 못했다. 그 무당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직도 그 애의 황금처럼 싯누런 이빨과 고양이같이 날카로운 눈이 기억난다. 정말로 그 애의 눈동자가 타원형이었는지, 아니면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일단 그 애의 눈만 쳐다봐도 겁이 났었다. 편견 때문이었을까?
그 무당집 바로 옆에 우리 교회가 있었다. 어느 날 이 무당이 그 교회 목사를 찾아왔다.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이 두 사람의 대결은 어린 내게도 충분히 흥미를 끄는 일이었다. 무당이 찾아온 사연은 이랬다. 교회의 십자가 철탑을 자기 집 쪽으로 옮겨놓은 다음부터는 굿을 하는 데에 신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철탑을 종전에 있던 자리로 옮겨놓을 수 없냐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고, 얼마 뒤 그 무당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 사건에서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먼저 그 무당이 사이비가 아니라는 것. 신이 내리지 않는다고 찾아올 정도라면, 정말로 이제까지 그에게 신이 내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로써 나는 그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비로소 신뢰(?)할 수 있었다. 까딱하면 개종할 뻔했던 나를 막은 것은 두 번째 교훈이었다. 즉 세상 귀신들 중에서 역시 예수 귀신이 가장 세다는 것. 그 무당이 굿할 때 족보를 팔던 그 수많은 신령들이 저 십자가 하나에 막혀 못 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소년은 그냥 교회에 다니기로 했다.
얼마 전에 <영매>라는 영화를 보았다. 거기에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무속과 기독교가 부딪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걸 보며 나는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문화충돌’을 떠올렸다. 무속에 대한 우리 세대의 관심은 대개 서구의 문화적 침략에 맞서는 문화운동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같은 세대에 속하는 감독은 색다른 관점에서 이 제재에 접근한다. ‘주체의 죽음’이라는 탈근대의 관점에서 ‘신 내림’이라는 엑스터시 체험을 조명하는 것이다. ‘합리성’을 숭상하는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무속은 한갓 ‘미신’에 불과하다. 하지만 합리적인 것이 때로 얼마나 비합리적이며, 비합리적인 것이 때로는 얼마나 합리적인가?
가령 무당이 엑스터시에 빠지면 그의 입을 통해 죽은 이가 말을 한다. 죽은 이를 모시려면 무당은 제 인격과 주체성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을 비운 그의 몸에 죽은 이가 들어와,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들려준다. 이로써 죽은 자는 한을 풀고, 산 자들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푼다. 무당의 엑스터시는 이렇게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소통의 채널을 마련함으로써,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했을 삶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엑스터시는 사람을 돕는다. 그것은 삶을 살린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사람을 살리는 엑스터시가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엑스터시도 있다. 요즘 파병하자고 설치는 이른바 안보 전문가라는 사람들. 이들은 지금 제 넋을 잃고 홀딱 엑스터시에 빠져 있다. 정신 나간 이들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은 추상적인 인류도, 구체적인 국익도 아니다. ‘네오콘’이라 불리는 미국의 해괴한 사교집단이다. 이 신흥 영매들은 침략전쟁을 거들어 제 나라의 인격을 부정하고, 미국의 국익을 위해 제 나라의 주체성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백악관의 부시 장군, 펜타곤의 럼스펠드 장군을 모신다. 그 굿판의 대가가 5천명 우리 젊은이들의 생목숨이다.
이런 일이 있을까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하셨던 것이다. 제 얼을 빼놓은 이 자들이 제 몸에 모신 것은 억울하게 ‘죽은 자’가 아니다. 잔혹하게 ‘죽인 자’들이다. 이들이 풀어주는 것은 희생자들의 간절한 ‘한’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너절한 욕망이다. 이들은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살리려 하지 않고 외려 멀쩡히 산 사람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백악관과 펜타곤에 기식하는 잡귀에 사로잡혀 손에 시퍼런 칼을 들고 덩기덩기 춤추는 선무당들이여, 제발 “죽음의 굿판을 당장 집어치우라”.진중권/ 문화평론가